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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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2021-10-11 (월) 장희은 /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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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갓 입학해 기숙사 생활 때 내 주변 친구들 대부분 집에서 생활비를 받아서 썼는데 나는 거의 받지 못했다. 친구들이 놀고 쇼핑하고 여행 가려고 과외를 했던 것과 달리, 나는 밥 먹고 생존하기 위해 과외를 뛰었다. 하루는 별로 친하지도 않던 동기 하나가 항상 돈이 없어 쩔쩔매는 나에게 밥을 사주며, 너희 집은 딸을 강하게 키우는구나, 한마디 했다. 당시 인색한 아버지를 불평하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생각을 바꿨다.

어느 날 학생회관 벽에 붙어 있는 어느 장학재단 공고가 눈에 번쩍 띄었다. 선발되면 졸업까지 매월 소정의 장학금을 지원해준다는 문구 하나에 한 줄기 빛에 홀린 듯 시험을 보러갔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붙었다. 합격생 행사에 가보니 국제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 출신들만 모여 있는데 내가 왜 여기 있지 싶었다. 나는 졸업 때까지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고 그 장학생으로 선발된 이후로 줄줄이 다른 여러 장학금들을 끊기지 않고 받아서 모든 공부를 아버지 도움 한번 없이 마쳤다.

아버지가 풍족한 생활비를 보내주셨다면 내가 그렇게 절박하게 시험을 보러갔을까. 당시 아버지의 심중은 알 수 없으며, 사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한 교육철학이 있더라도 드러내어 나와 공유하실 분은 아니다. 입시 유학 결혼 등 큰일에서도 한번도 본인의 의사를 내보이신 적 없이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하게 두셨고, 심지어 연락을 자주 하라던지, 흔하고 사소한 바람 한번 내비친 적이 없으시다. 아버지는 그저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열심히 자기 일을 하시고 주말마다 동네 공원 평행봉에 기계체조를 하러 다니시는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부탁하신 적이 한번 있었는데, 십여년 전 내 결혼식 전날이었다. 너무 의외의 것이라 들으면서도 놀랐다. 예식에서 신부가 울면 참 보기 싫더라고, 너는 울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신부 입장 직전, 닫힌 문 뒤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둘이서만 나란히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떨리고도 만감이 교차하던 짧은 순간, 아버지께 너무나 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면 혹시나 울어버릴까봐 말하지 않고 꾹 참았다. 대신 예식 내내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 아버지의 당부를 지키느라 하지 못했던 말, 지금까지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말,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희은 /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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