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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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들의 행렬

2021-10-01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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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에 높이 올라앉은 백인남성들이 도망가는 흑인들을 뒤쫓으며 가축 몰이하듯 내모는 광경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9일 텍사스의 국경마을 델 리오의 리오그란데 강가에서 국경수비대 기마대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려는 아이티 난민들을 쫓아내는 광경이었다. ‘21세기 미국’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한 이 장면은 과거 노예시대를 떠올리게 하고, 이 땅에 여전한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상기시키면서 대중적 분노를 촉발했다. 인권단체들은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아이티 주재 미국특사는 아이티 난민들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몰인정한 처사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사임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한 지 8개월. 트럼프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국민들이 행복했던 허니문은 끝나고, 아프간 철군 등 정책들을 둘러싼 불만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 와중에 아이티 난민문제가 불거지면서 바이든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지지부진한 그의 이민개혁이 도마 위에 올랐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희망이 있다는 곳, 기회가 있다는 곳으로 기어이 가보는 일일 것이다. 폭염과 싸우며, 목마름과 굶주림을 견디며, 때로 버스를 타고 주로 걸으며 수십일 걸려 도달한 곳, 바로 미국의 남쪽국경이다.


연방정부 데이터에 의하면 지난 2월부터 8월 사이 이곳에서 불법월경으로 적발된 케이스는 124만 건. 대부분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출신들로 이들 중 과반수는 체포 즉시 추방되었다. 공중보건 규정 타이틀 42가 적용된 결과이다. 외국인이 전염성 병원균 보유 가능성이 있을 경우 공중보건을 고려, 즉각 추방해도 된다는 반이민 법이다. 지난해 팬데믹을 빌미로 트럼프 행정부가 도입한 이 규정을 바이든 행정부가 델타변이 확산을 이유로 고수, 이민단체들이 분개하고 있다. 바이든이 “트럼프와 다른 게 뭐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9월 중순 리오그란데 강변마을 델 리오의 다리 밑에는 1만4,000명의 아이티인들이 운집했다. 마을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인파가 임시 천막촌에 기거하며 난민심사를 기다리고 있으니 상황이 보통 불안정한 게 아니었다. 텍사스 주지사가 연방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국토안보부는 다리 밑의 천막촌을 정리했다. 2,000명 정도는 타이틀 42를 적용, 비행기에 태워 아이티로 돌려보내고, 일부는 버스에 태워 다른 도시들로 분산 후 심사를 받게 하고, 나머지 수천명은 2개월 후 법정출두를 명하면서 그냥 석방했다. 강제송환이라는 비정한 결정에더해 추방과 석방의 기준이 모호한 것이 또 다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티인들을 리오그란데 강가로 불러 모은 것은 첫째 두려움이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이티는 비운의 나라이다. 천재지변과 정정불안이 그치지 않는다. 지난여름만 해도 대통령이 암살되고, 강도 7.2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임 대통령선거를 연기할 만큼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수도는 갱들이 거의 접수한 상태이다. 뒤이은 강진으로 2,000여명이 희생되고 건물들이 무너져 6만 명이 길거리로 나앉았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번에 텍사스 국경으로 몰려든 아이티인들 중 상당수는 멀리 남미에서 왔다. 2010년 강도 7.0의 대지진으로 20만명이 사망하고 150만명이 집을 잃은 후, 그리고 2016년 허리케인 매튜가 그나마 남은 기간시설과 농지를 파괴한 후, 많은 이들은 고향을 떠났다. 주로 브라질과 칠레 등 남미에 정착했는데, 지난해 팬데믹으로 경기가 침체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이주민들을 대하는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경제적 곤궁에 더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아이티 이주민들은 북으로 향했다. 아마존과 안데스를 지나고 중미를 거쳐 멕시코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행렬이 형성되었다.

이들의 ‘무작정 미국’행을 부추긴 두 번째 요인은 와전된 정보였다. 바이든은 이민자에 관대하다, 아이들 동반한 가족은 그냥 받아준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들은 길을 떠났다. 델 리오로 가면 국경 넘기가 쉽다는 정보도 퍼졌다. 이들의 등을 떠민 또 다른 요인은 희망, 그곳에 가면 잘 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이민자들을 침입자로 볼 것인가, 같이 살아갈 공존자로 볼 것인가. 이민은 미국을 가르는 중요한 이슈이다. 모두가 이민자로 이 땅에 왔으면서도 새로 오는 이민에 대해서는 포용과 배척으로 입장이 갈린다. 중남미인들이 줄기차게 국경을 넘는 것은 사실 미국이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잔디 깎고, 청소하며, 건물 짓고, 아이들과 환자와 노인들을 보살피며, 하다못해 한식당 주방에서 김치 깍두기 담는 인력이 어디서 오는가.

처음에는 손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지나면서 미국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이민자들이다. 그렇게 이민의 나라, 미국은 발전해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조속히 포괄적이고 인도적인 이민개혁을 이뤄내기를 기대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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