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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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목민’의 삶

2021-09-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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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미국 직장에서 일해 온 김명국씨는 은퇴 후 RV를 집으로 삼아 전국을 여행하면서 노후를 보내겠다는 계획을 아주 오래전 세웠다. 미국 자산관리회사에서 컴퓨터 담당자로 일하다 65세에 회사를 나온 그는 홈 디포의 키친 디자이너로 제2의 삶을 살다 지난 2019년 78세의 나이로 마침내 은퇴했다. 그리고는 평소 꿈꿔온 은퇴 후 계획을 곧 바로 실천에 옮겼다.

샌버나디노의 집을 판 후 그 돈으로 가장 먼저 튼튼하고 쓸 만한 중고 RV를 구입했다. 수천 달러를 들여 차량의 안전장치를 강화한 후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2020년 2월 드디어 미 전역을 도는 대장정에 들어갔다. 2월 샌디에고에서 시작한 장정은 11월까지 무려 9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는 이 기간 중 미 본토 49개 주 가운데 아칸소 한 곳만 제외한 48개주 모두를 돌았다. 총 운전거리는 3만7,000마일에 달했다.

그리고는 지난해 12월 구입한 데저트 핫 스프링스의 모빌 홈에서 겨울을 난 후 지난 4월 또 다시 대장정에 올랐다. 이 여정의 목적은 알래스카 곳곳을 훑는 것이었다. 그는 5개월 동안 총 1만3,000 마일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9월 중순 자신의 동절기 거점인 모빌 홈으로 다시 돌아왔다.


김씨는 “나에게 남은 시간을 소유가 아닌 더 많은 경험으로 채우고 싶었다”고 RV 위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 전역을 돌면서 무수한 새로운 풍경,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경우처럼 시간의 대부분을 RV에서 보내거나 완전히 RV에서만 생활하는 미국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팬데믹을 지나면서 한층 더 가속화되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도 RV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RV 소유와 판매 현황에서 확인된다. RV 산업협회에 따르며 RV를 소유하고 있는 북미 가구 수는 무려 1,120만에 달한다.

RV 소유주들 가운데 아예 이것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미국인들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적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RV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본인들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RV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김 씨처럼 은퇴생활을 즐기는 노인층 뿐 아니라 RV로 여행하고 일도 하는 젊은 층도 많다. 자발적 RV족은 오래 전에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유목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긱워크(단기노동 형태)를 통해 생활비와 여행경비를 충당한다.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사이트도 있고 아마존 같은 기업은 성수기 동안 RV족을 특별 모집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임시직뿐 아니라 CPA 등 전문직 일을 하는 RV족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이것을 가능케 해주고 있는 것은 디지털 기술이다. 그래서 이런 RV족들을 ‘디지털 유목민’ 혹은 워캠퍼스(Workampers, 캠퍼에서 일하는 사람들)라 부르는 것이다.

김명국씨가 80이 다 된 나이에 두려움 없이 대장정에 나설 결심을 한데는 본래 젊은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데다 미국회사에서 컴퓨터 관련 일을 해 영어와 디지털 기술에 능숙한 것도 도움이 됐다. 그는 여행 중 자녀들은 물론 지인들과도 수시로 소통한다. 타주에 사는 자녀 가족이 그의 여정 중간에 잠깐 합류해 같이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신유목민들을 위한 여건과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RV 위에서의 삶이 항상 안락할 수만은 없다. ‘분도킹’(boondocking), 즉 전기가 없는 곳에서 생활해야 할 때 있고 디지털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크게 불편할 수도 있는 이런 삶을 굳이 선택하고 있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소유보다는 경험”이라는 김명국씨의 말속에 바로 그 답이 들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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