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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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목

2021-09-25 (토) 손주리 / 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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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목(Dracaena fragrans)에 꽃이 피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다. 십팔구년 전 제법 실한 나무둥지에 작은 줄기 두 대가 나와 있는 행운목을 사다 길렀다. 키우기 쉽고 공기 정화력도 뛰어나다고 해서였지만, 이름처럼 집에 행운이나 듬뿍 가져다주었음 하는 바람도 있었다. 햇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 곁에 두었더니 옥수수 잎처럼 생긴 잎들이 얼마나 쑥쑥 잘 자라는지 예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관엽식물인 줄로만 알았다.

추운 샌프란시스코로 이사올 때도 이름 때문에 데려왔는데 전처럼 잘 자라지는 않아 신경을 쓰면서 돌보고 있었다. 잘 버텨서 기특하다 생각하고 있던 터에 팬데믹으로 한참 힘들던 작년 여름 느닷없이 아이보리 색의 꽃봉오리가 맺혔다. 행운목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늙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줄 알았다.

꽃망울 상태로 한참 있더니 어느 날 두꺼운 줄기가 피노키오의 코처럼 길게 뻗으면서 작은 파꽃 같은 꽃이 방울방울 맺혔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꽃이, 강산이 두번 바뀔 세월을 보내고 피어났음에도,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줄기와 꽃 크기가 균형이 안 맞는다 싶었다.


꽃이 핀 후 거실에 나가면 아카시아 꽃보다는 강하고, 백리향 꽃보다는 부드러운 향이 있다가 없다가 했다. 이 감미로운 향이 설마 행운목에서 나오랴 싶어 맡아보면 아무 향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낮에는 향을 닫고 밤에만 향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꿀색의 진액마저 뚝뚝 흘리며 피워내는 행운목의 꽃향기는, 평생 찾아 헤매던 긴 가시에 가슴을 찔려 죽어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가시나무새 전설을 연상할 만큼, 마지막 향기를 뿜어내고 시들어 죽을 건가 싶게 고혹적이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행운목의 학명에서 Dracaena는 그리스 신화에서 암룡(female dragon)을 나타내는 Drakaina에서 유래된 것으로, 칼 모양의 구불구불한 잎이 있고 진액을 뿜어내는 식물군을 통칭한다. 비슷한 식물들 중 행운목에는 향기가 덧붙었으니, 행운목에서 향기가 얼마나 비중있는 특징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저 밋밋해 보이는 이 나무가 어쩌다 한번 피우는 꽃향기 때문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는 것이다. 보통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평범하게 살다갈 내가 남기고 갈 잊히지 않을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본다.

<손주리 / 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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