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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우도 키어 연기인생 50년의 집대성”

2021-09-24 (금)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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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배우 우도 키어

▶ 영화 ‘스완 송’(Swan Song)

“배우 우도 키어 연기인생 50년의 집대성”
“배우 우도 키어 연기인생 50년의 집대성”

영화 ‘스완 송’(Swan Song) 화면 캡쳐.



연기 생애 50여 년 간 200여 편의 유럽과 미국 영화와 TV 작품에 출연한 독일 태생의 배우 우도 키어(76)를 영상으로 인터뷰 했다. 키어는‘스완 송’(Swan Song)에서 자기가 죽으면 마지막으로 머리단장을 해달라는 전 고객의 유언을 수행하기 위해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 샌더스키에 있는 양로원을 빠져 나와 은퇴 전에 활동하던 동네를 찾아가면서 자신의 생애도 정리하는 동성애자 미용사 팻으로 나온다. 이 마을 출신의 감독 토드 스티븐스의 경험 실화를 바탕으로 한‘스완 송’은 코믹한 분위기를 지닌 달콤 씁쓰름한 드라마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키어는 유머와 함께 영화 속 제스처를 재연하면서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했다. 키어는 LA 인근 사막지대 휴양지인 팜 스프링스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각본을 읽고 좋아서 감독을 만났다. 그는 연기를 사전 연습 없이 하고 가능하면 각본 순서대로 찍자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미용실에 가서 미용하는 방법도 배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샌더스키에 가서 팻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팻이 생전 담배를 어떤 모습으로 피웠는지 또 어떻게 걸었는지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배웠다. 또 마을의 양노원에 며칠 머물면서 분위기를 숙지했다. 나는 관객들이 보기에 내가 팻을 연기한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영화는 샌더스키 현지에서 단 18일 만에 찍었고 제작비의 상당 부분은 영화와 관계없는 일반인들의 돈으로 충당했다.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나서 놀라고도 즐거웠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로부터 내 연기 생활 50년 만에 가장 뛰어난 연기라는 평을 받았다.”

-팻은 자신의 과거를 재방문하면서 삶의 마지막을 정돈하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당신의 과거가 떠올랐는지.

“내가 영화에 선뜻 나오기로 한 것도 바로 그 과거 때문이다. 영화는 한때 유명했던 노인이 자기 과거로 돌아가는 얘기다. 팻이 과거로 돌아가면서 나도 내 과거가 생각났다. 내가 어렸을 때 독일에서 동성애를 하다가 적발되면 감옥엘 갔다. 그런데 요즘에는 젊은 동성애자들이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영화에서 팻이 에이즈로 사망한 자기 애인 데이빗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이 특별히 좋았다. 묘비 앞의 내 모습은 연기가 아니다. 그런데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젊었을 때와 요즘 영화가 어떻게 다른 것 같은가.

“요즘 영화는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배우들이 한 장면을 찍고 나면 그 즉시 모니터로 달려가 자기 연기를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다시 찍곤 하나 옛날에는 모니터가 없어 촬영 이튿날 인화된 필름을 보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 됐으면 다시 찍었다. 이 영화는 옛 날 식으로 찍었다. 샌더스키 거리가 스튜디오였고 동네 사람들은 팻의 생전 차림을 한 날 보면‘하이 팻’하고 인사를 했다. 과거를 재 경험 하고 싶은 내게 큰 기쁨을 준 영화다.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점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특별히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통 예술인들은 돈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고 하겠는데 당신은 어떤지.

“난 무일푼으로 태어났다. 나는 홀어머니 맡에서 자랐는데 그 것은 내 아버지가 유부남인데도 그 것을 숨기고 어머니와 정을 통한 뒤 달아났기 때문이다. 너무 가난해 주 엿새 끼니를 야채수프로 때워 억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끔찍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신문도 배달하고 빵가게에서도 일했다. 집에 더운 물이 안 나와 겨울에도 찬 물로 세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바이에르에 취직하거나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 기자가 되기 위해 영어를 배우려고 영국으로 갔다. 런던에서 우연히 영화사에 의해 발탁돼 영화에 나와 신문들로부터‘영화의 새 얼굴’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배우가 된 것이다. 이런 과거 때문에 난 절대로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시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 충분히 돈을 저축했다. 전에 도서관이었던 이 내 집과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목장이 있고 또 LA에도 집이 있다.”


-이 영화는 당신이 주연한 첫 미국 영화인데 앞으로도 주연할 작품을 고르겠는가.

“그렇다. 뉴욕타임스와 LA타임스 등을 비롯해 많은 신문 잡지들이 내 생애 50년 만에 보여준 가장 훌륭한 연기라고 칭찬했다. 그래서 난 지금 내 과거의 영화들을 분석하면서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하고 있다. 최근에 런던과 뉴욕에서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난 이들을 다 거절했다. 그 역이 주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연과 조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연 배우는 작품을 시종일관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스완 송’을 계기로 난 지금 주연할 작품들을 찾고 있는 중이다.”

-사막에 사는 것을 좋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여기서는 여자들이 매년 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넓은 공간이 좋다. 주차 미터기가 없는 것과 대부분 주민들이 은퇴해 공격적인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맛 좋은 음식과 멋진 건축물들이 많은 것도 좋다. 여기서 차로 25분 거리에 있는 내 목장도 좋다. 난 많은 야자수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정원사고 되었을 것이다. 흙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난 불평할 것이 있으면 친구들을 괴롭히는 대신 나무들에게 얘기한다. 나무들은 언제나 행복한데 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물을 공급하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막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다소 걸린다.”

-처음에는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배우생활을 즐기게 되었는가.

“내가 나온‘프랑켄스타인’의 프리미어 차 파리에 갔을 때 로만 폴란스키와 한 클럽에 들렀었다. 어느 남자가 내게 닥아 오더니‘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 ’O의 이야기‘에 당신을 쓰고자한다’기에 난 그 즉시‘그런 포르노영화엔 안 나온다’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 남자는 내 전화번호를 적은 뒤 자리를 떴다. 그러자 폴란스키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이 날 보고‘그 영화의 원작인 책은 파리에서 금서로 취급 받고 있는데 당신이 그 영화에 나오면 온갖 잡지의 표지 인물로 나올 것’이라며 출연하라고 종용했다. 그래서 그 영화에 나왔는데 이 영화가 그 때까지 내가 나온 저예산 영화들과 다른 첫 상업영화였다. 이로 인해 나는 큰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각광과 함께 많은 출연료도 날 흡족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오케이’하고 많은 상업영화에 출연하면서 마돈나의 비디오에까지 나왔다. 이제 여생을 걱정 없이 지낼 만큼 돈도 모아 두었고 또 큰 칭찬을 받은 이 영화에도 나왔으니 난 행운아라고 하겠다.”

-영상으로 보니 당신 거실에 그림과 조각과 디자이너 램프가 보이는데 당신과 미술과의 관계는 어떤지.

“난 독일에서 자랄 때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화가 친구들이 많았다. 난 화가들과 있기를 좋아하는데 영화보다 미술에 대해 더 잘 안다. 언젠가 파리에 머물렀을 때 호텔 방에 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자코메티의 그림을 사다가 벽에 꽂고 감상하기도 했다. 난 특히 현대미술을 좋아해 데이빗 호크니와 앤디 와홀 그리고 로버트 메이플소프 및 제프 쿤 등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 데이빗 호크니와는 친구 지간이다. 많은 그림들을 샀지만 결코 투자용이 아니다. 그림을 누구에게 주면 주었지 팔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로서 난 미술가들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들은 종이와 펜만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고생하면서 당신을 키운 어머니가 당신의 성공을 당신과 함께 즐겼는지.

“내가 배우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 했을 때 어머니는 정육점이나 식품점에 가실 때마다 내 기사가 나온 신문들을 들고 나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아들 자랑하느라고 나간 지 오래 돼서야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어머니는 훌륭한 여자였는데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집을 사드렸다. 돌아가실 때까지 잘 사셨는데 그 것은 이렇게 성공하도록 날 키우신 어머니에 대한 내 보답이다.”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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