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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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축

2021-09-06 (월) 최청원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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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노오란 벼이삭이 펼쳐진 둑을 거닐며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아이들이 어느덧 장년을 지나 노인이 되었다. 일생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일손을 반쯤 내려놓으니 그 남은 약간의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 시간을 잘 쓰고 싶어 그동안 못 했던 일들을 여러 계획으로 넣었다.

그 하나로 구석에 처박혀있던 턴테이블과 가구를 톱질하고 색깔을 다시 입혔다. 그리고 싸게 구입한 스피커들로 저, 중, 고음을 분리시키고 조립하여 아날로그시절의 전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오래 간직하고 있었던 비닐판의 음악소리를 들으니 현대 디지털시대에 들어온 음악과 앰프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그윽하고 아늑한 포용감이 다가온다. 옛날 그 시절에 느꼈던 정서가 안개 몰려오듯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소리를, 그 음악을 들으면서 옛사람들의 찬란한 예술과 그들의 덕성까지 그리워진다. 현대의 첨단 디지털 소리가 못 쫓아가는 아날로그 소리의 특이한 맛이다. 직접 조립하여 듣는다는 의미부여 때문에 더 좋은 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옛 화덕에서 갓 지어낸 흰 쌀밥을 퍼 올리는 밥주걱에 따라오는 하얀 김의 구수함에 도저히 현대 전기밥솥으로는 느낄 수 없는 냄새와 맛과 정취가 있듯이….


어린 손주에게 안도현 시인의 “만년필로 잉크냄새가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는 시 구절을 읽어주니 이메일로 보내면 될 걸 왜 쓰느냐며, 더 나아가 만년필이 무어냐 묻는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나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는데 손주는 그런 생각은 없는지,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려고 진지하게 묻는다.

밝은 촉광의 문명 속에 사는 신세대 그룹, 더 새롭고 더 빠른 것을 찾는 그들은 우리가 가졌던 여유롭고 아늑한 정감이 묻어나는 예술과 옛사람들의 존경스러웠던 덕성을 얼마나 접하고 느낄 수 있을까?

쓰고 말하는 것보다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이 훨씬 능숙한 손주를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찬란한 은하수를 소개시켜주어야겠다. 별들의 전쟁(STAR WAR)만 떠올리지 말고 생활 속에서 별들의 의미도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도록 설명해봐야지. 그들도 우리처럼 나이 들었을 때 되새겨볼 수 있는 아름답고 아늑하고 깊이 있는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최청원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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