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은 왜 실패했을까

2021-08-20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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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시간, 2조 달러의 비용 그리고 미군 2,448명의 생명 -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쏟아 부은 자원들이다. 2001년 10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이후 4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이어졌던 ‘영원한 전쟁’은 마침내 종식되었다. 승자는 탈레반, 패자는 미국.

지난 15일 카불 함락의 날은 46년 전 사이공 함락의 날을 판박이 하며 수퍼파워 미국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놓았다. 19세기 대영제국, 20세기 소련에 이어 21세기 미국이 손을 털고 나오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으로서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험준한 지형, 부족 종교 언어 등에 따라 복잡하게 갈라지며 뿌리내린 토착 세력들, 외세로부터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강한 집단정서 … 최강의 제국들은 기세 좋게 쳐들어갔다가 끝내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오곤 했다.


미국은 9.11 테러 주범인 알카에다를 응징하기 위해 아프간을 공격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아프간을 통치하며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던 때였다. 전쟁은 2개월 만에 가볍게 끝났다. 탈레반 정부는 무너지고 알카에다는 궤멸되었다. 탈레반의 공포정치에서 해방된 아프간 국민들에게 권력의 열쇠를 넘겨주고 나면 ‘임무는 끝’이라고 당시 부시 행정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부시가 내어놓은 것이 ‘국가 건설(Nation Building)’이었다. 테러와의 전쟁 다음 단계로 아프간 국민들이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민주적 국가 건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라는 논리였다. 그렇게 미군이 주둔하는 동안 탈레반이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교전이 이어져온 것이 지난 20년이었다. 부시, 오바마, 트럼프 모두 ‘전쟁종식’을 선언하고 번복하기를 반복하다가 이번에 바이든이 철군을 단행하면서 마침내 미국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지난 20년 동안 아프간 정부군의 무기 및 장비, 훈련비용으로 830억 달러 등 총 1조 달러를 아프간에 쏟아 부었다. 객관적으로 아프간 정부군은 지금쯤 최정예 군대가 되어있어야 마땅하다. 불과 한달 전 바이든은 9.11 테러 20주년에 맞춘 철군 일정을 확인하며 “철수는 안전하고 질서 있게 진행될 것이다. 7만 5,000의 (오합지졸) 탈레반이 최첨단무기를 갖춘 30만 정부군을 물리치고 아프간을 장악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고 장담했다.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탈레반은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카불은 탈출행렬로 생지옥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국은 왜 아프간에서 실패한 걸까. ‘빙산의 일각’을 떠올려본다. 아프간은 대단히 저 개발된 국가이다. 인구 100만 넘는 도시가 별로 없다. 주변지역 포함해 인구 400만의 카불이 대도시로 꼽힐 뿐이다. 3,700만 전체 인구의 3/4은 시골 벽촌에 살고 있다.

아울러 오랜 내전으로 엘리트 계층은 해외로 이주, 중앙정부는 대부분 젊은 해외 유학파로 구성되어 있다. 탈레반이 진격하자마자 해외로 달아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역시 성년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일반 국민들은 이들 엘리트를 뜨악해 했다. 상호간 공감대가 별로 없었다. 미국이 교류한 부류는 빙산의 꼭대기 계층, 수면 아래 감춰진 거대한 민심은 드러나지 않았다.

미국의 ‘돈 잔치’는 소수 특권층의 배만 불리고, 중앙정부 지방정부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면서 민심은 오래 전에 친미정부를 떠나 있었다. 그 결과 경찰은 아프간에서 ‘가장 미움 받는 조직’이 되고, 정부와 탈레반 중 어느 쪽이 더 큰 악의 집단인지 국민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했다. 군대에서 무기는 뒤로 빼돌려지고 봉급은 안 나오니 군인들은 탈레반에 맞서 싸울 힘도 의지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등 돌린 민심을 거둬들인 것이 탈레반이었다. 탈레반은 때로 협박하고, 때로 회유하며 차근차근 풀뿌리 지지기반을 확장해 나갔다. 부족사회 성격 강한 시골에서 정부군과 탈레반 반군은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 월급 못 받는 군인들에게 탈레반은 탈영 조건으로 한달치 봉급을 제안하기도 하고, 중앙정부에 알리지 않은 채 양측이 정전 합의를 하기도 했다.

부정부패, 무능의 전형으로 찍힌 친미 정부에 반해 탈레반은 내세울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아프간 민족주의를 위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탈레반의 선전에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장기전은 민심을 얼마나 얻느냐의 싸움이다. 미국의 천문학적 돈과 시간,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은 20년 전, 미국 개입 이전으로 돌아갔다. 탈레반의 공포정치를 기억하는 국민들, 특히 여성들은 겁에 질려있다. 아프간의 미래와 통치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아프간 국민들의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바이든의 말은 맞다. 그렇기는 해도 제정일치 압정에 무방비로 내몰릴 그 국민들의 처지가 가슴 아프다. 나라 복이 지지리도 없는 민족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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