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쿠오모, 다 가진 자의 함정

2021-08-13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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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퀸즈에서 변호사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난 후 63년,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명문은 케네디 가와 부시 가. 그런데 뉴욕 주로 가면 또 다른 독보적 정치가문이 있다. 이탈리아계의 쿠오모 가문이다.

아버지 마리오 쿠오모는 1980년대 초반부터 12년간 뉴욕주지사를 거친 뒤 민주당 대권후보로 거론되었던 정계 거물. 장남 앤드류 쿠오모는 아버지의 후광 아래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아버지처럼 법학을 공부하고 1982년 아버지의 주지사 선거 캠페인 매니저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한 후 뉴욕주 정책보좌관, 클린턴 행정부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뉴욕주 검찰총장 등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는 2010년 말 주지사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게다가 그는 케네디 가의 사위이기도 했다. 1990년 결혼(2005년 이혼)한 아내 케리는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딸, 즉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다. 뉴욕의 로열패밀리라는 말이 나올만한 조건들이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삶이 최고점에 달한 것은 지난해였다. 코비드-19 팬데믹으로 뉴욕주가 공포에 빠졌을 때, 주지사로서 그가 진행한 그날그날의 상황 브리핑이 대히트를 쳤다. 브리핑은 매일 전국에 중계되며 루즈벨트의 노변담화 혹은 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라디오 담화에 비견되었다. 암담한 현실에서 “희망을 주고, 믿음을 준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코로나 대응 관련 뉴욕주민들의 지지는 87%에 이르렀다. 두서없고 불통이던 트럼프와 대조되며 그는 소통의 주지사로 전국적 인기를 누렸고, 대통령 감으로 거론되었다.

그것이 1년 전이었다. 그리고는 1년 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지난 10일 쿠오모는 사임을 발표했다. 높이 올랐다는 건 그만큼 처참하게 추락할 수 있다는 것. 밀랍 날개로 하늘 높이 날던 이카로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으면서 급추락하는 고통을 지금 그는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공고하던 쿠오모 권력의 성채를 허문 것은 일견 사소한 것이었다. 쿠오모 자신은 아직도 사소하다 여기는 성희롱 성추행 전력이 그를 무너트렸다. 지난해 12월 전직 보좌관이 처음 폭로한 후 총 11명의 여성들이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자 뉴욕주 검찰이 조사에 나서고, 지난 3일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다. 전·현직 보좌관에 대한 그의 성추행 의혹들은 사실이며 연방법과 주법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다. 바이든 대통령. 의회 민주당 지도부, 뉴욕주의회로부터 사퇴요구의 십자포화가 쏟아지자 지난 몇 달 버티고 버티던 쿠오모는 결국 사임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을 가볍게 껴안고, 몸을 슬쩍 만지고, 볼에 키스하는 등의 행동은 친근감의 표현일 뿐 성추행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사회학과 심리학계가 근년 많은 연구를 하는 주제가 성희롱^추행이다. 특히 권력계층은 왜 그렇게 툭하면 성희롱에 연루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3년여 전 와인스틴 사건이 터지고 #미투 봇물이 터진 후 할리웃은 물론 정계, 재계, 미디어, 예술계, 스포츠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고위직 남성들이 성희롱 행실이 폭로되면서 물러났다.

연구결과를 보면 성희롱하는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감정이입/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전통적 남녀역할을 굳게 믿으며, 권위주의적이어서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 주변 환경이 도와주면 성희롱 성향은 현실이 된다. 남성중심 조직문화, 고위직들이 서로 눈감아주는 끼리끼리 문화 등이다. 권력 막강한 보스들에게는 규정이나 규범이 느슨하게 적용되는 현실 또한 영향을 미친다. 몇 번 성희롱해도 별 문제가 없으면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는 권력의 속성. 권력은 눈을 멀게 한다.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충동적 행동을 거침없이 하게 되고, 사회적 관습을 우습게보게 되며,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거기에 더해 매사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성희롱을 대놓고 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당연히 여성들로부터 성적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에고와 휴브리스, 즉 자기중심과 오만의 문제이다. 모든 걸 다 가진 자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그리고 쿠오모는 상당부분 이의 전형이다. 로열패밀리의 장남으로 권력을 타고난 그는 마키아벨리주의 마초로 유명하다. 권력추구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은 확실하게 보복하며, 부하직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감히 말을 못하게 위압적이라는 평판이다. 그런 그가 평소 여성들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 가능하다.

성희롱^추행을 가볍게 보던 시대는 지났다.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쿠오모가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지금 한창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자. 품행에 문제는 없는지, 남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는지. 천길 높이의 큰 둑도 작은 개미구멍이 커져서 무너진다고 했다. <논설위원>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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