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체조 도마는 출발에서 착지까지 4초 정도에 경기가 끝난다. 올림픽 도마 선수의 4년은 이 4초를 위한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1초 준비에 1년을 쓰는 셈이다. 메달을 딴 한국 10대 도마선수가 경기 후 뜨거운 눈물을 쏟은 마음이 헤아려 진다.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면 완치까지는 최대 1년이 걸린다고 한다. “뚝” 하는 순간, 세상이 끝난 듯할 것이다. 운동선수는 이런 치명적인 부상 위험을 달고 산다. 이를 악문 재활에 성공해야 올림픽은 도전의 길을 열어 보인다. 한국 여자펜싱 메달리스트에게 있었던 일이다.
올림픽이 감동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 승리의 스토리 때문이다. 놀라운 기량과 새로 쓰여지는 신기록도 그 뒤에 인간 정신을 초극하는 도전과 인고의 휴먼스토리가 없다면 빛이 바랜다. 늘 100%이상이 요구되는 최선, 뼈를 깎는 고통의 순간도 겪었기에 올림픽은 매번 감동으로 찾아온다.
월드컵 축구에 세계가 환호하는 것은 국가 대항전이기 때문이다. 경기 수준은 유럽 프로축구 클럽 대항전이 한 수 위다. 올림픽도 그렇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리면 시민권을 딴 지 오래될수록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은 레슬링 양정모 선수에게서 나왔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였다. 직장의 TV 앞에서 환호하는 한인여성에게 지나던 미국인 동료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니? 친구? 친척?“ “아니, 한국사람이야!”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수영과 육상에서만 수 십개의 메달이 쏟아지던 나라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도쿄 올림픽이 이번 주말 폐막된다. 어느 새 며칠 남지 않았다. 팬데믹에 개최된 무관중 올림픽은 당연히 여러 면에서 예전 대회 같지 않았다. 때를 잘못 만난 축제였다. 5년만에 다시 열린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양궁은 중국 여자탁구 개인전처럼 단체전 9연패의 전설을 썼다.
한국 양궁에서는 맑은 눈빛의 20살 여대생이 3관왕, 또랑또랑한 눈빛의 17살 고교생이 2관왕에 올랐다. 소년은 실질적인 가장이라고 한다. 그 책임감이 승리의 원동력 중 하나로 전해져 마음이 아팠으나 장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번 달에 만 40세가 된다는 선수도 대단했다. 그는 9년전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리스트로, 국가대표에 처음 선발된 것은 23년 전 일이라고 한다. 이런 경력의 그가 한참 아래 후배들과 다시 원팀을 이뤄 승리를 일궈낸 것은 선후배 문화가 뿌리 깊은 나라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나 때는 말이야”를 버려야 했다.
이번 올림픽 양궁은 ‘새로운 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생각이다. 올림픽 기간에 보도로 전해진 한국 양궁의 이야기들이 과장 없는 사실이라면, 한국 양궁은 한국 사회에 새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수 차 나온 이야기지만 대표선수 선발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공정하고, 투명했다고 한다. 오직 지금의 실력만으로 평가하는 사회, 학연 지연 없는 사회, ‘아빠 찬스’ ‘엄마 찬스’ 없는 사회에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공정 이야말로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K문화가 됐으면 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그중 하나는 한국언론에서 느껴진 소재의 편향성이다. 올림픽에서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만 찾아 나설 일이 아니다. 참가하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참가했다면 올림픽의 안전은 함께 걱정해 가는 자세여야 한다. 올림픽은 주최국만의 행사가 아니고, 참가선수와 참가국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올림픽이 이루어지기까지 숨은 희생과 자원봉사의 노고는 없었나 더 찾아봤어야 했다.
올림픽은 승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후의 승리 하나는 99개의 패배 위에 이뤄진다. 패배 중에는 승리보다 값진 것이 있다. 이런 실패를 주목해야 한다. 올림피안의 패배는 그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한 것이므로 아름다운 패배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24시간 문을 여는 선수촌 식당은 하루 4만8,000끼의 식사를 제공한다. 메뉴가 700여 가지에 이른다. 그 중에는 한식과 김치도 포함돼 있다. 한국만의 도시락이 필요했다면 ‘고추장 파워’니 하는 말로 얼마든지 다르게 포장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산 식재료의 안전성이 거론된 것은 잘못됐다. 선수촌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많은 다른 나라 선수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선수촌 식사는 주최국이 대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일본이 그랬다면 한국의 반응과 국민정서는 어땠을 것 같은가.
혐한에 맞서 혐일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 누구를 미워하고만 살 것인가. 일본은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져서는 안 되는 나라라고 젊은 세대를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미성숙할 뿐 아니라 건강하지 않다. 또 다른 콤플렉스의 소산으로도 보일 수 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도, 올바른 극일의 방법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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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