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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선수도 사람이다”

2021-08-03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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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도쿄에서 들려온 올림픽 뉴스 중 가장 큰 화제는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24)의 기권 소식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체조선수로 평가받는 바일스가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의 첫 종목(도마)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낸 후 나머지 3개 종목(이단평행봉, 평균대, 마루)을 뛰지 않고 기권한 것이다. 자신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힌 그는 “운동선수도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개인종합 출전도 모두 포기했다.

그의 기권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바일스의 금메달은 너무나 확실해서 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몇 개를 더 추가할 것인가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4개 종목(단체전, 개인종합, 도마, 마루)의 금메달을 휩쓸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2013년 우승한 이후 모든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이 금메달 19, 은메달 3, 동메달 3개를 획득해 두 메이저대회 통산 30개의 메달을 따낸 미국 체조계의 살아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일스에게 쏟아진 기대는 컸고, 그 중압감이 그를 신경쇠약 일보직전까지 몰고 간 듯하다. “미국을 떠나 도쿄로 향하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그는 경기 전날 인스타그램에서 “온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기분”이라고 토로했고 다음 날 아침 예선대회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혼란을 느꼈다. 공중으로 붕 떠서 수차례 회전하고 착지해야하는 체조의 특성상, 몸과 정신이 일치되지 않는 채로 경기를 펼쳤다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체조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동작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는 트위스트(Twist)인데, 바일스는 나중에 올린 글에서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2.5회전 비틀었어야하는데 1.5회밖에 틀지 못했다. 다행히 안전하게 착지했지만 사진과 내 눈을 보면 내가 공중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수 있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힘들고 경쟁적인 이 무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올림픽 경기,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경기에 임하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면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몸과 마음을 위험에 빠뜨리는 대신 자신을 보호하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바일스의 기권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올림픽 선수가 경기 도중 육체적인 문제로 탈락하거나 기권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나 정신건강을 이야기한 선수는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비난이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됐으나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그의 선택에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운동선수도 인간’이라는 한마디가 ‘혁명적’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동료들은 국가나 단체의 목표보다 자신의 정신건강을 우선시함으로써 스포츠계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 그녀의 최대 업적이라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체조 여제’ 시몬 바일스는 어렵게 자랐다. 중독문제를 가진 싱글맘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포스터홈을 전전하던 그를 세 살 무렵 외할아버지가 데려다 키웠다. 6세 때 데이케어에서 처음 체조를 해봤는데, 그의 특별한 공간감각을 눈여겨본 교사의 추천으로 체조 프로그램에 등록, 8세부터 훈련받기 시작했다.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학교를 떠나 홈스쿨링하면서 훈련에 몰두했고, 2014년부터 UCLA에 적을 두고 활동하다가 다음해 프로로 전향했다.

기계체조에서 흑인이 약하다는 편견을 깬 바일스는 4피트8인치의 작은 키에 딴딴한 체격과 카리스마, 어떤 역경도 다 이겨낼 것 같은 ‘수퍼영웅’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 무적의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 자체가 파격이고 혁명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하다. 2018년 미국국가대표 체조선수들의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가 선수 265명에게 성폭력을 저질러왔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바일스도 그의 성추행 및 성폭력 피해자임을 폭로했다. 이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고 밝힌 그는 자신이 24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도 도쿄올림픽에 출전하는 이유는 올림픽 무대에서 이 사건을 환기하고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올림픽선수를 떠올릴 때 그들의 정신을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로지 그들의 육체, 근육으로 다져진 빛나는 육체가 내는 초인적인 힘과 경이로운 기록만을 본다. 개인보다 나라의 명예를 걸고 나서는 불굴의 전사, 최고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채 맹훈련을 거듭하는 그들은 강인한 체력만큼이나 강인한 멘탈도 타고났으리라 믿는다.

시몬 바일스가 ‘정신건강’을 말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놀라고 반성하고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올림픽 선수는 누구나 영웅이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보낸 시간, 치른 희생, 감수한 위험을 생각하면 메달 여부와 관계없이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시몬 바일스는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물러남으로써 진정한 용기와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보여주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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