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발언대 - 마지막 밀사

2021-07-28 (수)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크게 작게
1905년 8월 3일 목요일 오후 한 낮, 오전에 맨하탄에서 출발한 한 척의 배가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 항(조선말로 ‘굴포항’)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굴포항에 정박한 배에서 동양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내렸다. 30세의 이승만과 25세의 윤병구였다. 두 사람은 굴포항에서 1Km 쯤 떨어진 시내 중심에 위치한 옥타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2층에 여장을 푼 두 사람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여행용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은 가지런히 타이프 쳐진 2장으로 된 서류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서로 격려하듯 얼굴을 바라보는 그 두 청년의 눈빛은 탁자에 놓인 전기스탠드 불빛을 받아 밝게 빛났으며, 지난 2개월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굴포항 시내의 양복점에 들러 검은 색 턱시도와 실크로 된 탑해트를 빌려 입고 바로 마차를 불러 사가모어힐로 향했다. 사가모어힐은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이었다.

1905년 8월 5일 토요일 아침, 밤잠을 못 이룬 이승만과 윤병구는 마차를 타고 사가모어힐로 향하며 희망의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른 두 청년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사가모어힐 응접실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냥하여 박제로 만들어 놓은 동물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통령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당황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청원서만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짧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들고 간 자개로 된 접시 한 점을 선물로 증정했다.

루즈벨트는 청원서의 내용을 읽어본 후 “나를 찾아주니 기쁘오. 나도 당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 채널을 통하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어렵소. 당신네 공사를 시켜 국무성에 제출하시오.” 루즈벨트 대통령은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달라면서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응접실을 바로 나가버렸다.

조금은 허탈해진 두 청년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한국공사관의 김윤정에게 루즈벨트의 말대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윤정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않아 어떠한 요구도 들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해 1905년 11월 17일 조선과 일본 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외교권을 잃었다. 하와이로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주도 금지되었다, 1906년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러ㆍ일 평화협정 중재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경술국치를 당해 나라를 잃었다.

이승만과 윤병구, 조선의 마지막 밀사들은 워싱턴 한국 공사관의 무지와 무능을 탓하며 망국의 울분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이 두 밀사가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기 며칠 전인 7월 29일 동경에서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암 H.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는 “일본은 필리핀을 침범하지 않고, 미국은 한국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이미 맺어 일본의 조선의 침략을 용인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7월 31일자로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밀약을 추인하는 전보를 동경에 보냈었던 것이다. 이 가쓰라ㆍ태프트 밀약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1924년의 일이었다.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