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던 1946년. 7월의 첫 일요일인 7일, 조지아 주 한 시골마을의 조그만 교회당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21살의 신랑과 초급대학을 마친 18살의 신부가 결혼서약을 하고 생의 행진을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신랑신부는 행복했고, 가족친지들은 풋풋한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복했다.
하지만 당시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행진이 얼마나 풍성한 성취를 이뤄낼지,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였다. 행진은 30년 후 백악관에 이르고, 이후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으로 이어졌으며, 가난과 질병 인권탄압으로 고통 받는 세계 각처로 이어졌다. 행진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미 카터(96) 전 대통령과 로잘린(93) 여사가 7일 결혼 75주년을 맞았다. 미국의 역대 전직 대통령 45명 중 최장수 기록에 더해 최장기 결혼 기록까지 세우면서 카터는 2개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부부는 조용하게 기념일을 맞은 후 주말에 모교인 플레인스 고등학교에서 가족친지 수백명과 함께 성대한 축하파티를 갖는다.
‘결혼 75주년’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 결혼하고, 이혼하지 않으며, 부부가 같이 장수해야 가능한 특별한 행운이다.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는 해리 트루먼,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등 7명이 결혼 50주년을 맞았다. 카터부부 못지않게 금슬이 좋았던 조지 H.W. 부시부부는 바버라 여사가 2018년 세상을 떠나면서 결혼 73주년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보다 젊은 세대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는 우선 나이가 75세가 안되었다.
같은 사람과 75년을 ‘행복하게’ 사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결혼 10주년쯤 되면서 권태기에 빠진 젊은 부부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벌써 지겨운데, 지금도 이렇게 많이 싸우는데, 어떻게 수십 년을 더 같이 살까 싶은 부부들이 많을 것이다.
금슬 좋은 부부들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날이 갈수록 상대방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열정적 사랑으로 결혼해도 매일 대하다보면 소 닭 보듯 무덤덤해지는 게 보통이고, 하도 부딪혀서 상대방을 보면 화부터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들은 무엇이 다른 걸까. 이들은 배우자가 인생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다.
결혼 75주년을 맞아 미디어들이 카터 부부를 인터뷰했다. 행복한 결혼 비결을 묻는 질문에 카터는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대통령도 되어보고 노벨상도 수상했지만 “내 인생의 최고봉은 로잘린과 결혼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아버지 부시도 생전에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이 세상 최정상에 올랐다고 하겠지만, 그건 바버라의 남편이 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행복한 결혼의 첫째 비결로 카터는 자신에게 딱 맞는 배우자를 꼽는다. 천생연분을 만나라는 것인데, 아마도 그런 인연은 첫눈에 알아보는 모양이다. 17살의 부시는 16살의 바버라를 크리스마스 댄스파티에서 보고는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카터는 로잘린과 첫 데이트 후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고.
그리고 나면 결혼생활 내내 필요한 것은 ‘완전한 동반관계’라고 로잘린 여사는 말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대등한 파트너 관계가 저절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모든 남성은 저도 모르게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카터 부부에게도 ‘사건’이 없지 않았다. 가장 큰 ‘대형사고’는 해군장교였던 그의 제대 결정. 결혼 초기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한 카터는 가업을 잇기 위해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큰 결정을 내리면서 아내와 한마디 의논이 없었으니 불화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후 부부는 땅콩농장 사업을 같이 하면서 동반관계를 만들어갔고, 정계에 진출하면서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다. 백악관에서 카터가 가장 신뢰한 정치 조언자는 로잘린이었다.
결혼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일이다. ‘네모’와 ‘세모’가 만나 하나가 되려니 부딪침은 당연하다. 모서리가 깨져 나가기도 하고 완전히 갈라지기도 한다. 성공적 결혼이란 각자의 모서리가 부드럽게 마모돼 둥글게 닮아가는 것. 끊임없는 화해와 소통은 필수라고 카터부부는 말한다. 지금도 매일 밤 부부는 낮 동안의 다툼/이견을 해소하고 나서야 잠을 잔다.
아울러 ‘같이 또 따로’ 사는 생활방식이 부부의 행복 비결.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한편 공통의 취미를 찾아 함께 하는 것이다. 부부는 스키, 들새관찰, 제물낚시를 즐긴다.
그렇게 부부는 75년을 같이 살았다. 연로해 거동이 제한되니 부부는 더욱 살갑게 의지하며 그윽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 특별한 행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부부는 분명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것이다. 이 부부가 사는 법을 모두 따라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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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