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스 시크릿(Victoria‘s Secret)이 대대적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수십 년 미국 란제리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해온 기업이 브랜드이미지를 완전히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자사 아이콘인 ‘에인절스(Angels)’를 없애고, 다양한 체형을 포괄하는 마케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인1세들, 특히 남성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에인절스’로 상징되는 섹시한 미의 기준이 우리의 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브라나 팬티 등 란제리는 편안하면 되는 실용적인 의류였다. 섹시한 란제리는 할리웃 스타 등 특정 그룹만이 애용하던 특수 품목이었다. 이런 섹시 이미지를 일반대중 내의류에 접목, 미국 란제리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 빅토리아스 시크릿이다. 여성들의 내면에 잠재한 섹시한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건드림으로써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상술인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에인절스’는 섹시 이미지 홍보 ‘천사’들. 풍만한 가슴에 비현실적으로 늘~씬한 다리를 가진 이들 모델이 란제리, 보석류, 깃털날개 등을 걸치고 무대를 활보하는 빅토리아스 시크릿 연례 패션쇼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여년 TV로 방영되면서 전국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여성들에게는 선망, 남성들에게는 관음의 대상이 되면서 센세이셔널한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생겨난 것은 에인절스 같은 몸매가 미의 표준이라는 인식. 그런 몸매라야 남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 메시지는 너무 강력해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 특히 남들 평가에 예민한 10대 소녀들을 가학 수준의 다이어트와 운동 그리고 좌절감으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이런 문화는 평소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던 우리의 딸들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하곤 했다. 학교에서 인기 있는 여학생들은 십중팔구 하얀 피부, 노란 머리의 늘씬한 백인아이들. 서구인들과는 체형이 다른 한인소녀들 중 많은 수는 외모 콤플렉스 속에 사춘기를 보내곤 했다. 성인이 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지만, 그렇다고 사춘기의 아픔이나 상처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 약한 경우, 외모에 대한 불만족은 극한 다이어트와 미용성형을 반복하며 평생을 가기도 한다.
그것이 최근까지의 현실이었다. 이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패션잡지, TV광고, 의류브랜드 등이 주도해온 이 사회의 편협한 미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움직임이다. “여성들이 왜 몸매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하는가. 건강과는 아무 상관없는 몸매/체중 관리하느라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 돈이 얼마인가. 그 정성을 다른 데 쏟는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니 몸매의 덫에서 벗어나자, 남성의 시선을 통해 미적가치를 저울질 당하는 객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자는 인식이다. 밀레니얼과 Z 세대가 주도하는 ‘몸에 대한 긍정’ 운동이다.
최근 ‘몸 이야기(Body Talk)’라는 책을 펴낸 케이티 스투리노(37)는 뚱뚱한 몸 덕분에 일약 유명인사가 된 여성이다. 일명 ‘몸 받아들이기’ 활동가인 그는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58만명인 인플루언서이자 과체중 여성들의 특별한 필요를 겨냥한 미용 브랜드 ‘메가베이브’로 성공한 사업가이다.
20대 때부터 패션 홍보전문가로 일했던 그는 업무 차 패션잡지사들을 방문할 때마다 자기비하에 빠지곤 했다고 고백한다. 멋지고 늘씬한 여성들 사이에 있노라면 자신은 말 그대로 스커트 입은 곰같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뚱뚱하다’고 하면 미련하고, 게으르고, 보기 흉하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의 편견도 작용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어 2015년 ‘사이즈 12정도 스타일(The 12ish Style)’이라는 블로그를 시작하고, 2018년 #MakeMySize(내 사이즈 만들어주오)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면서 플러스 사이즈 여성들 돕기에 나섰다.
고급 브랜드들일수록 사이즈 12 이상 제품을 거의 다루지 않는 ‘사이즈 차별’에 맞서는 운동인데 반응이 엄청났다. 미국 여성의 68%가 사이즈 14 이상이라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고충을 전면에 내세워주면서 그는 일약 ‘몸에 대한 긍정’ 운동의 대모가 되었다.
빅토리아스 시크릿의 쇄신 결정은 이런 변화의 여파로 보인다. 기존의 ‘에인절스’ 유형의 이미지를 고수하다가는 시장에서 밀려난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젊은 세대가 사이즈 포괄적 브랜드들로 돌아서면서 빅토리아스 시크릿 시장점유율은 과거 30%에서 15%로 절반이 깎였다. 한편 그동안 억눌려있던 플러스 사이즈 의류 시장은 급속하게 커질 전망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뚱뚱하다고 주눅 들던 시대는 지났다. 여성들이 ‘내 몸’에당당해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본은 당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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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