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1일 프랑스의 음악 축제가 열리자 파리 시민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은 클럽대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야외 마스크 착용의무 해제와 야간통행 조치 금지가 없어지면서 시민들은 밤새도록 음악과 춤을 즐겼다고 한다.
파리,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에펠탑,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콩코드 광장, 노트르담 사원, 몽마르트 언덕...전통 문화적 향취가 그윽한 그 도시, 어느 곳 하나 버릴 곳 없는 문화재로 가득한 이 도시가 전쟁당시 불타버릴 뻔 했다.
1944년 8월 독일 아돌프 히틀러가 내린 파리 폭격 명령을 거절한 한 군인, 그것도 독일 군인의 항명이 이 도시를 살렸다. 독일군 파리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다. 그런데 히틀러는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며 계속 명령 시행을 재촉한다.
콜티츠는 선택해야 했다. “차마 내손으로 파리를 파괴할 수는 없어. 난 이곳을 지키기로 했네.” 전쟁이 끝난 뒤, 전범 재판에서 그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 파리의 영웅’ 이 되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 전통 문화재를 구한 두 인물이 있다.
경찰관 차일혁은 6.25 당시 유격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토벌대장을 하다가 경찰관에 채용되었고 그의 많은 업적 중 하나가 화엄사를 구한 것이다. 1951년 5월 상부로부터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이상의 세월도 부족하다.”며 그는 항명했다.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면 화엄사의 문짝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수행가능하다는 지혜를 보여주어 화엄사는 전쟁의 불길을 피해 살아남았다.
작전 불이행으로 감봉 처분을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이 화엄사의 전각들, 지리산 천은사, 쌍계사, 모악산의 금산사, 정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그 외 전라도의 수많은 크고 작은 고찰들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구해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화엄사를 방문하면 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볼 수 있다, 화엄사 입구에는 차일혁 경무관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공군조종사의 상징 ‘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김영환 장군,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으로 함께 공군을 창설한 주역 중 1명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지리산 지역에 북한군 패잔병들이 주축이 된 7,000여명의 무장공비들이 후방 지역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1951년 8월 김영환은 지리산지구 공중지원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전투경찰대와 정찰기로부터 공격 목표를 지정받았다. 공비들이 은거 해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였다. 당시 그가 모는 F-51에는 500파운드 폭탄과 기총은 물론 네이팜탄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네이팜탄 한 발이면 온 사찰이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이때 김영환은 해인사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 기수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공비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사찰을 떠날 것이고 해인사 폭격은 눈앞의 전투에서 승리하나 역사와 후손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임을 알고 중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로써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제52호)과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는 지켜졌고 2002년 해인사 입구에 김영환 공적비가 세워졌다.
우리는 살다보면 이러 저러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다. 하나의 선택이 당장의 삶을 위태롭게 하고 그로 인해 핍박을 받을지언정 지나고 보면 결국은 잘된 선택임을 깨닫게 될 때가 온다. 다만 어느 선택이 적절한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때는 실리보다는 양심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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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