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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왜 안 가려고 하세요?”

2021-06-03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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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이 미국 군대가 아니라 한국 군대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난센스 같지만 현실이다. 한국의 국적법과 병역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이른바 원정출산 때문에 생긴 문제다. 원래 목적은 이들의 병역 기피를 막기 위해서였다. 재벌가의 딸이 하와이에서, 유력 정치인의 며느리는 또 어디서 원정출산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자녀를 미국에서 낳고 돌아갈 여유가 있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동포 2세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선천적 복수국적 문제가 제기된 것은 10년도 더 지났지만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본인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면 아직 세세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골치 아픈 것을 왜 굳이 알려 하겠는가.

간략하게 예를 들면, 출생 당시 부모중 한 사람은 미국 시민권자, 또 한 사람은 영주권자라면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이 부여된다. 그와 함께 병역의무도 부과된다. 외국에서 살고 있으면 한국적을 이탈할 수 있지만 신청 기간은 18세 되던 해의 3월까지. 이 때를 놓치면 원칙적으로 38세까지 병역의무를 벗어나기 어렵다.


선천적 복수국적-.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안다고 해도 그렇지, 생각지도 못했던 국적이탈 신청은 또 어떻게 때를 놓치지 않고, 구비 서류를 모두 갖춰 신청하나. 재외공관이 먼 지역에 살면서 맞벌이로 정신없는 사람들에게는 부당한 요구라고 봐야 한다.

총영사관의 담당 영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천적 복수국적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대뜸 “한국 국민이 왜 군대를 안 가려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아하,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한국에서는, 적어도 정부 담당자는.

미국서 살겠다고 이민 온 사람들의 2세들에게 한국 군대는 가고, 말고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식의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제도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면 병역 기피가 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영어봉사장학생으로 불리는 TaLK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대학 2년을 마치면 한국의 농어촌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다. 경비는 한국정부가 부담한다. 시골 학생들에게는 원어민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 2세 대학생들에게는 한국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 말 그대로 상생의 프로그램으로 환영받았다. 처음에는 교육원에서 홍보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말이 쑥 들어갔다.

총영사관 고위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물어 봤다. “그게 말이죠…” 선천적 복수국적 때문이었다. 미국서 태어난 2세가 6개월, 혹은 1년씩 한국에, 그것도 일해서 돈을 받으면 병역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영어봉사로 나갔다가 징집 영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선천적 복수국적이 미국의 공직 진출이나 사관학교 진학 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려진 일이다. 처음에는 지원자도 미국기관에서도 몰랐다. 제도 자체를 몰랐으니 속인다고 오마조마할 필요도 없었다. 해외동포, 미주 한인들에게 선천적 복수국적은 그런 제도이다.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마침내 관련규정은 지난해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이 법을 자로 재듯 적용할 수 없는예외적인 사례도 많이 보도됐다. 지금은 법 개정 절차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은근과 끈기가 놀라울 정도다.


이 문제가 아직 이대로인 것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입법을 통해 바로 잡으려는 정치인이 없다. 이 법의 제정을 주도했던 한 중진의원은 지금은 복당 문제에 열심일 뿐, 여기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표도 없는 해외동포를 헤아린 법 개정, 자칫 역풍도 걱정된다는 이 일에 어느 정치인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기회주의적 병역면탈이라는 국민 정서 때문이라고 한다. 그 정서가 한국서 유행하고 있는 내로남불은 아닐 지 모르겠다. 내가 가는 이민은 로맨스, 남이 가는 이민은 불륜? 이제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내 자식의 미국 시민권은 로맨스, 남의 자식 시민권은 불륜? 설마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런 정서가 있다면 정부가 나서 차근차근 설명해야 할 일인데, 당국의 입장은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 왜 군대가지 않으려고 하세요?”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시민권 문제도 그렇다. 미국 시민권을 따는 것은 첫째 부모형제 이민 초청을 위해, 두번째는 꼬박꼬박 세금은 내는 데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복지 혜택에서 제외되지 않기 위해서가 많다. 시민권 신청을 안 한 이유 중에는 한국에 아파트 등 부동산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재산권 행사에 걸림돌이 되었으니까. 국적 유지가 장한 일인듯 여겨지는 정서가 항상 옳지는 않다. 해외동포의 조국 사랑은 다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

한국어로 의사 소통도 어려운 2세들을 병력 자원으로 묶어 놓아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천적 복수국적제는 모병제가 되야 바뀔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기 보다는 중동의 어느 나라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면 유학생도, 2세도 남 먼저 자발적으로 귀국하는 나라가 되면 좋겠는데, 너무 이상적인가.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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