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범죄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흔히 경찰관이 범죄 용의자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고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법적 절차에 따라 ‘미란다 원칙’(Miranda Warning)을 알려주는 것으로, ‘형사 피의자는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피의자의 진술이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으며,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고지의 주 내용이다.
‘미란다 원칙’은 1963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18세 소녀를 납치·강간한 혐의로 체포된 당시 22세(1941년생) 에르네스토 미란다(Ernesto Miranda)의 인명에서 유래하였다.
경찰은 피해자의 진술을 토대로 범행에 사용된 트럭의 번호판을 알아내고 용의자로 지목된 미란다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이어진 2시간 가량의 피의자 심문을 통해 경찰은 큰 어려움 없이 범행 전모를 자백 받고 구두 진술서에 자필 서명을 받아 미란다를 재판에 회부했다.
추후 조사에서도 밝혀진 사실이지만, 심문 과정에서 강압적인 행위는 일체 없었기 때문에 미란다의 자백은 전적으로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재판에서 미란다의 국선변호사로 선임된 70대의 노익장 ‘앨빈 무어(Alvin Moore)’는, 당연히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에 초점을 맞춰 변론을 전개할 것이라는 검찰의 예상을 뒤집고 창조적인 논리로 검찰을 놀라게 했다.
즉 “미란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금지하고,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명시’한 수정헌법 제 5조의 내용을 알 턱이 없고, 수사관들이 이를 미란다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애당초 헌법적 권리가 무시된 불법 상태에서 자백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다”고 증거력의 무효를 애써 강조했던 것이다.
미란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에게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범행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노 변호사의 재기 발랄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미란다의 자백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며 20~30년 징역형의 유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미란다 측이 연방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구속상태에서의 심문이 피의자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및 피의자의 인권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의 합리적 수사관행 중 어느 것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를 놓고 미전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명의 소수의견 대법관은 “변호인으로부터 ‘진술을 거부하라’는 충고를 들은 범인이 무엇 때문에 자백을 하겠으며, 이렇게 되면 국가의 기능인 사회의 안전이 어떻게 유지되겠느냐?”고 반대론을 개진했으나 1표가 모자라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5-4 원심 판결 파기로 미란다가 석방됨으로써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이 서두 극중의 묘사처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 후 기복이 심한 미란다의 인생 역정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무료의 국선변호사 한번 잘 만난 덕에 풀려나게 된 ‘떠버리’ 미란다는 어느 날 동거녀에게 자신의 범행에 대해 그만 떠벌리고 만다.
검사는 동거녀의 증언에다 다른 증거를 보강하여 끝내 법원으로부터 20~30년 징역형의 유죄판결을 받아내 미란다를 다시 감방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교도소 복역 중 1972년 가석방으로 방면된 미란다는 피닉스법원 앞에서 자신이 ‘미란다 원칙’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우쭐대며 미란다 원칙이 쓰인 카드에 사인을 해주고 1불 50전씩 받으며 생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그러다 1976년 술집에서 취객과 사소한 시비 끝에 칼에 찔려 살해되었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살인 용의자 에스키엘 모레노(Eseziquiel Moreno)가 경찰조사에서 미란다 원칙을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에스키엘은, 자신의 묵비권 행사로 경찰이 추가 증거를 수집하는 사이에 잠적하여 오늘날까지 잡히지 않고 있다. ‘미란다 원칙’에 묻혀있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한 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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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