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담아두면 ‘한’ 풀어내면 ‘흥’

2021-03-19 (금)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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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흥이 많고 한도 많다. 일상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적인 가사로 된 흥타령을 부르고 맺힌 한을 푸는 신세타령도 익살과 해학을 이용한다. 사람과 천지의 기운이 만나 하나가 되는 즐거움이 ‘흥’이라면 복합적인 원인으로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한’이다.

방탄소년단(BTS)의 그래미 수상이 불발되었다. 지난해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K팝의 역사를 새로 썼던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그래미 베스트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디스코 팝으로 흥을 폭발시키며 9억 뷰를 넘는 뮤직 비디오 조회수를 자랑했지만 레이디 가가와 아리아나 그란데가 콜래보한 ‘레인 온 미’(Rain on Me)에게 졌다. 그래미상 투표 회원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탓이다.

그래미는 대중 음악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축음기(Gramophone)가 기원이다. 팝과 클래식을 아우르는 음악계에서 가장 정평 있는 상으로 1959년에 제정되어 레코딩 아카데미가 주관한다. 매년 위촉을 받은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수상자를 선발하는데 올해 회원 분포를 보면 흑인과 히스패닉이 각각 21%, 8%를 차지하고 아시안은 3%에 불과하다. 나머지 68%가 백인이다. 1만3,000여명의 회원들 중 한국에는 방시혁 빅히트 의장과 방탄소년단 7명이 있다.


백인들이 주도해온 그래미가 흑인 음악에 개방성을 보인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2017년 그래미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비욘세의 ‘레모네이드’는 영국 출신 백인가수 아델에게 밀려 본상을 하나도 타지 못했다. 당시 비욘세의 음악은 백인우월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한 흑인여성이 다른 흑인여성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노래한 비욘세의 급진적인 흑인 여성의 사상과 저항의 미학이 그래미를 수상할 리 없었다.

이처럼 보수 성향으로 일관하던 그래미가 올해 태도를 싹 바꿨다. BLM(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를 지지한 싱어송라이터 허(H.E.R)의 ‘아이 캔트 브리드’에게 그래미 4대 본상인 ‘올해의 노래’ 트로피를 안겼다.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를 들썩인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해내지 못한 그래미상 후보에 올라 시상식 단독공연을 펼쳤다. 더이상 백인 관객의 구미에 맞는 아티스트가 되지 않아도 대중음악 산업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다양성의 승리다.

코로나19로 인해 멈춰서고 모두가 고립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어려운 상황에서 BTS는 ‘아미’라는 팬덤의 위력을 입증하며 음악의 소비 방식에 있어 거대한 변화를 꾀했다. 전 세계적인 봉쇄상황 속에서 ‘아미‘라고 불리는 끈끈한 세계 곳곳의 팬들과 강력하게 연대해나가는 BTS를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하며 ‘음악산업에서 인간적 유대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학습 사례’라고 했다.

BTS의 인간적 유대는 한국인의 ‘흥과 한’이 끌어내는 감정의 카타르시스에서 비롯된다. ‘담아두면 한이고 풀어내면 흥’이라고 하지 않나. 방탄소년단의 멤버인 슈가(August D)가 지난해 선보인 ‘대취타’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군악으로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대취타’를 샘플링해서 힙합 트랩비트로 만든 곡인데 궁궐과 저잣거리를 배경으로 촬영된 이 뮤직 비디오는 현재 2억뷰를 훌쩍 넘어섰다. 슈가가 자신을 ‘범’에 비유해 랩을 쏟아내고 검무를 추며 흥을 깨워낸다.

범이 깨우는 ‘흥’이라면 역시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다. 자라가 땅위로 올라가 토끼를 발견해 ‘토선생’이라고 외쳐야 했는데 입이 덜 풀려서 ‘호선생’이라고 외쳤다. 호랑이는 오랜만에 자기를 불러 신이 나서 산을 내려온다는 대목,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수궁가’의 범 내려오는 대목을 신나는 비트로 믹싱한 곡이다. 조선후기 판소리 명창 ‘이날치’(1820-1892)의 이름을 밴드명으로 차용한 이들이 지난해 현대무용 그룹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협업한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은 대히트를 치며 ‘조선팝’이란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정장에 고무신을 신고 머리엔 갓을 쓴 앰비규어스 무용수들이 온 몸으로 폭발시키는 기가 막힌 흥이 힙합 판소리 가락을 타고 대한 짐승과 한 짐생의 이미지를 장르파괴의 요상한 춤사위로 표현하니 웃음보가 터지는 건 당연하다.

예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상치 못한 놀라움, 고정관념의 타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토대로 추구하는 독창성, 다급한 분초를 그려내다가도 반대로 시간을 끌어안는 넓은 품이 아닐까. 과거의 예술 작품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달리 보인다. 경제 재개가 시작됐다. 코로나19로 맺힌 ‘한’ 담아두지 말고 우리 안의 ‘흥’을 다시 풀어내 심기일전하자.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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