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시다. 눈 가느다랗게 뜨고 하늘을 본다. 늘 거기에 있었던 하늘. 3월의 하늘이라서일까. 뭉실구름 한가롭게 떠도는 곳에 봄결이 묻어난다. 바람 스치는 얼굴에 미소 지어진다. 숨쉬는 소리가 들린다. 코끝으로 드나드는 호흡이 조금씩 길어진다. 세상 중심에 내가 있음을 실감한다.
가만 눈을 감는다. 봄볕 받은 어깨랑 등이 따스하다. 무심, 무욕, 무아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래서 그 많은 성인들 사상과 뜻으로 오랜 세월 퇴색하지 않은 언어가 바로 ‘자신을 비워라’ 인가보다. 흔하게 듣고 알았던 그 일상의 언어가 가슴뭉클하게 감동으로 전해온다.
번뇌의 뿌리, 상처의 근원, 아픔의 원인, 갈등의 시작. 세상 잘 살겠다는 염원의 방향 욕심되어 일어나는 것들이다. 잘 산다는 것, 성공 한다는 것, 명예롭다는 것, 부자 된다는 것, 바람직한 일이다. 욕심없이 가능 할 지를 사고하면서 웃는다. 아니 삶 자체가 모든 갈등과 번뇌 아픔으로 점철된 흐름의 질곡이기에 고통의 바다 (苦浿)라고 칭했을 것이다.
예쁜 그림이나 자연풍경 혹은 인물 사진 곁들여 보내온 문자들 ‘ 꽃 길만 걸으세요, 행복하세요, 좋은 일 만 있으시기를! 등등의 톡을 수 없이 받는다. 자주 받다 보니 꽃길, 행복, 좋은 일이라는 더 할 나위 없이 필요하고 좋은 단어, 너무 흔하게 쓰고 있어서인지 별 느낌이 없다.
보내는 내용대로 읽고 보내는 이의 마음 전달 받아 행복하고 좋은 일 생각하면 되는데. 시간과 정성 기울여 만들었을 아름답고 신기하기까지 한 그림이나 영상이 영혼없는 이의 독백처럼 의미없이 다가온다.
세상사에 펼쳐진 모든 희로애락 아울러 느낄 때 삶의 참 맛 알고 정상적인 삶인 것이다. 오직 꽃길만, 좋은 일만, 사랑만 등등 그것만 있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좋은 것이, 그 꽃길이, 그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가능하리라.
치열하게 사는 일. 성취감의 짜릿함, 몸의 세포를 일어서게 한다. 단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 딛고 일어서는 일이 있었다면 밟힌 이보다 밟은 이가 진실로 되받아 아프다는 것, 그것을 깨어있는 마음은 안다. 깨어있음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누군가의 언행에 맞받아 상처 주는 글 쓰고 ‘내가 잘했지’ 라며 웃는다면, ‘그 분은 커피 한 잔 산 적 없다’ 는 얘기 듣는다면 인생 잘못 살았다 하겠다.
그러나 그들은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단지 그 허물이라는 것. 깨어있으므로 자신 내면의 감성과 언행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인생을 가장 잘 살 수 있는 길이다. 성스러움이다. 허술한 자신을 완벽하게 완성시키고. 그냥 사는 일상을 위대하게 바꿔주는 큰 가르침이다. 얼마만큼 철저하게 깨어있어야 하는가.
전문수행용어로 ‘위파사나’다. 호흡에, 마음의 변화에,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내가 나를 알아가고, 나와 대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한 일이 습관화 되면서 인간 삶의 방향과, 생각의 기준이 세상 바라보는 시선 섬세해지고 깊어진다. 그러므로 깨어있음은 자비다. 사랑이다. 행복이다.
깨어있음으로 그동안 무료했던 나날을 순간순간 새롭게 장식 할 수 있다. 자신의 한 생각 행동을 지켜본다면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을 즐기는 것으로 바뀌게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마음이 설렌다. 새싹 돋는 봄이라서인지. 그렇다면 물론 가능하다.
흔한 글이라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꽃길만 걸을 수 있게 되리 라” . 어떤 험한 상황일지라도.
무심한 일상의 일이 귀하고 위대한 성공의 자취임을 재확인 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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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원/뉴욕불교방송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