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친 손과 부은 발

2021-03-12 (금)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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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8일자 뉴욕타임스에 전면 주황색 바탕에 주먹만한 흰 글씨로 ‘Women belong in the kitchen’이라고 제목을 단 버거킹 광고가 실렸다. 여자더러 부엌에 머물라니, 어디서 들어본 소리다. 오래 전 한국에 자가운전시대가 오면서 운전이 서툰 여성 때문에 도로가 막히자 뒤차의 남성 운전자가 “솥뚜껑 운전이나 하지, 뭐 하러 차 끌고 나와!’ 하고 소리치는 격이다.

성차별적인 광고, 브랜드를 망치는 나쁜 홍보라는 등등 논란이 일자 버거킹은 여성 요리사 부족현상이 계속되고 있어 요리하는 여성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재빠른 해명에 나섰다.

이 광고가 게재된 3월8일은 국제적으로 인정한 여성의 날이었고 이번 3월은 미국의 여성 역사의 달(Women‘s History Month in US)이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에서 일어난 여성들의 지위 향상 운동을 시작으로 여성역사주간 행사가 열리다가 1987년 미 의회는 3월을 전국여성 역사의 달로 선언했다.


3월이면 여성들의 성취와 투쟁을 기념하고자 우주비행사, 노벨상 수상자, 사업가, 인권운동가, 과학자, 스포츠 등 각 분야 업적을 달성한 여성들이 언론에 소개되곤 한다.

한인들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3.1절로 3월을 시작한다. 뉴욕을 비롯 미주 전지역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여는데 미주지역에 사는 독립유공자들도 많다.

2018년부터 한국 보훈처의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총 1만6,000여명의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3%도 안 된다고 한다. 여성의 공이 크다고 해도 공훈 심사에서 입증 자료가 부족하다며 번번이 탈락한다고 한다.

전장에서 일제와 직접 전투를 해야만 독립운동가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중국이나 만주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 아내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전당포에 이불 잡히고 시장에 나가 겉옷 팔고 부잣집 대문 앞에 밤새 때고 버린 매탄재를 주워다 땠다. 또 상인이 팔다 버린 배추 시래기를 시장에 나가 주워서는 잘게 썰고 옥수수 가루 한줌을 넣고 죽을 쑤어 끼니를 마련하는 일, 가족의 옷가지를 빨고 밤새워 해진 부분을 바느질하고 다리고, 이 모든 일을 여성들이 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 남편이나 아들이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에 가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날품을 팔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옥바라지까지 한 여성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독립유공자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아내, 딸, 며느리가 함께 했다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한인사회에도 여성의 인권을 위해 일한 단체 설립자, 한국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 평생을 바친 교육자, 주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사업가 등등 개인으로나 단체 활동으로나 빛나는 성과를 이룬 여성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 없는 한인여성들의 삶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없다.

1965년 개정이민법 통과와 1968년 새 이민법 발효로 이민 오는 한인들의 수는 부쩍 늘었다. 이들은 흑인밀집지역을 포함 어디든지 가서 장사를 시작했다. 청과, 수산업, 네일, 세탁업 등 한인 주종업종에서 부인들은 카운트에 앉거나 직접 미싱을 돌리고 생선을 튀겨냈다. 많은 여성들이 식당, 네일살롱, 반찬가게 등에서 종일 일하면서 주급을 받아 생활비에 보태었다.

잠자는 아기를 포대기 째 싸서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어린 아이는 집 키를 목에 걸어 학교에 보내거나 방과 후 학교에 보내야했다. 퇴근 후 외출복도 못 벗고 곧장 부엌으로 가 저녁을 차렸다.

며느리, 아내, 엄마, 워킹우먼으로 일인 4역, 5역을 거뜬히 해낸 성실 근면한 여성들, 이들이 진정한 미국 여성 역사의 달 주인공들이다. 일하는 여성들의 정성과 희생, 이 3월에 그들의 거친 손과 퉁퉁 부은 발에 경의를 표하자.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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