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리 아이작 정

2021-03-09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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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나리’(Minari)에 대한 관심과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은 후 미디어의 극찬을 받아온 이 영화는 올해 오스카상 유력 후보로도 점쳐지고 있다. 2021 오스카상 후보작 발표는 3월15일, 시상식은 4월25일인데 이미 지난달 예비후보 발표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 후보에 선정됨으로써 다른 주요 부문에서도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나리’가 영화계에서 화제를 모으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감독 리 아이작 정의 자전적 스토리라는 점,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쫓는 이민가정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점, 그리고 배우 스티븐 연, 윤여정, 앨런 김의 뛰어난 연기다. 정 감독은 이미 6개의 주요영화제에서 극본상을 수상했고, 배우 세 사람 역시 수차례 연기상을 수상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주류언론이 이들을 인터뷰한 기사들을 크게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건 아이작 정 감독의 스토리다. 그는 영화계에 입문하자마자 크게 주목받았으나 이후 몇 개의 타작을 내놓은 후 커리어에 자신을 잃었고, 감독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도전한 영화로 마침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인생역전 드라마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정 감독이 얼마 전 LA타임스에 직접 기고한 글과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토대로 알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1978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아칸소 주 링컨의 시골농장으로 이사해 실제로 트레일러 집에서 성장했다. 신호등도 없고, K-12학년까지 학교가 단 한 개뿐인 아주 외딴 곳이었다. 거기서 예일대학으로 진학, 의사를 꿈꾸며 생물학을 전공했던 그는 우연히 영화 클래스를 접하면서 진로를 바꿔 유타 대학에서 영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그는 매년여름 선교활동을 하는 예술심리치료사 아내의 권유로 르완다를 방문했다가 첫 영화를 찍게 된다. 현지소년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던 클래스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학생들을 기용해 ‘무뉴랑가보’(Munyurangabo, 2007)를 찍은 것이다. 집단학살과 내전으로 상처 입은 르완다에서 원수지간인 후투족과 투치족의 두 소년이 우정을 나누는 로드무비다.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11일간 촬영한 ‘무뉴랑가보’는 놀랍게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후보에 올랐고 다른 많은 영화제에서도 후보에 오르며 큰 화제를 모았다.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데뷔작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자신감에 넘쳤고 2010년 ‘럭키 라이프’(Lucky Life), 2013년 ‘아비가일’(Abigail Harm)을 내놓았으나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감독이 되었다는 불안감에 영화를 찍기 위해 찍었던 시절”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2018년 초 그는 영화감독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인천 송도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부임까지 몇 달의 시간이 남았을 때 그는 마지막 영화 한 편을 써보기로 한다. 사우스 패사디나의 커피샵, 늘 앉는 테이블에서 컴퓨터를 닫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윌라 캐서’(Willa Cather)라는 생소한 두 단어가 들려왔다. 그런 일은 생전 처음이라 깜짝 놀라서 검색해보니 1961년 작고한 유명한 소설가 이름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저작권 시효가 지났고 누구든 허가 없이 영화화할 수 있었다.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간 그는 캐서의 수많은 책들 가운데 1918년 출판된 첫 걸작 ‘마이 안토니아’를 집어 들었다.

네브라스카 농장에서 자란 주인공의 이야기는 아칸소 농장에서 자란 정 감독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곧바로 매혹돼 각색할 궁리를 하던 중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는데, 캐서는 할리웃이 그의 한 작품을 영화화했을 때 너무 실망해서 앞으로 다시는 자신의 책을 영화로 각색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그의 소설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하나씩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처음 트레일러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놀라며 실망하던 일, 금방 갈아낸 흙에서 나던 냄새, 흙 색깔을 보고 좋아하던 아버지, 냇가에서 뱀을 향해 돌을 던졌던 일, 할머니가 한국서 가져온 채소를 심자 쑥쑥 자라던 모습…. 그런 장면들이 수십개 모여서 ‘미나리’가 탄생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연설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의 경우에도 비슷한 말을 적용할 수 있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감동적인 것이다.”

한인 감독이 만든 영화 ‘미나리’가 지난해의 ‘기생충’에 이어 또 다시 오스카 후보에 오르고 수상도 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나리’와 ‘기생충’은 많은 면에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섣부른 예단은 힘들어 보인다. 솔직하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미나리’를 재미있게 보지 않았다. 잔잔한 감동은 있지만 느슨하고 우울한데다 소품 분위기가 강해서 영화로서 매혹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연히, ‘미나리’가 오스카 시상대에 오르기를 바라고 응원한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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