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기억이 맞다면 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아 충남의 할아버지댁에 다녀왔더니 가스레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은 연탄 아궁이가 놓인 5층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석유 곤로로 조리를 해왔었다. 1983년, 그 가스레인지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내 손으로 불을 피워 음식을 처음 만들어 먹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물론 불이 무서웠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에 먹을 게 없었느냐고? 아니었다. 어머니가 차려 놓고 나간 밥과 반찬을 먹기는 했지만 먹성이 좋았던 어린 나는 금세 허기에 시달렸다. 저녁까지는 아직 까마득히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 나는 불씨를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마음으로 밸브를 열고 가스레인지의 노브를 돌렸다. 물은 그냥 눈대중으로 담아 끓였다. 이후 라면은 토요일 점심의 특식 메뉴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식문화의 공기 같은 ‘라면’
1985년,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척을 통해 구독했던 여성지에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1958년의 일이다. 그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가진 전부를 날리고 스스로 삶을 마감할 생각까지 먹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걸치자며 들른 선술집에서 그동안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뎀뿌라를 튀기고자 식재료에 걸쭉한 반죽을 입혀 끓는 기름에 담그니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바로 저거다! 밀가루 면을 튀기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기포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다공질이 된다. 덕분에 끓는 물에 넣으면 수분을 훨씬 더 잘 흡수해 빨리 익는다. 남자는 안도 모모후쿠(1910~2007), 그가 개발에 거듭 실패한 음식은 바로 라면이었다. 몇달의 연구 끝에 같은해 8월, 튀긴 면에 닭고기맛 스프를 더한 치킨 라면이 발매됐다. 안도의 라면은 세계로 진출하다 못해 미국의 교도소에서는 화폐로도 쓰인다. 싸고 흔한데다가 감출 만큼 작지도 않고 유통기한도 긴 덕분이다. 한편 한국에는 1963년 상륙해 쇠고기 국물에 고춧가루의 얼큰한 맛으로 탈바꿈했다.
1988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매점이 딸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히 성장한 중학생들이 배고픔에 쫓겨 매점으로 줄달음을 쳤다. 24인치 컴퓨터 모니터만한 쪽창 하나에 어미새가 물어온 먹이를 받아 먹는 새끼새처럼 매달려 군것질거리를 샀다. 빵을 주로 먹었던 나는 어느날, 고학년들이 봉지라면을 먹는 광경을 목도했다. 봉지를 뜯어 스프를 붓고는 그대로 사발면을 위한 뜨거운 물을 부었다. 오, 저렇게 해도 면발이 익기는 익나보다. 1997년, 드디어 ’뽀글이’라 불리는 유사 즉석 봉지라면의 맛을 보았다. 야간 경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새벽의 병영이었다. 뭐야, 맛이 없는데? 면은 불기만 해 딱딱했고 채 한소끔도 끓지 못한 국물은 얄팍하고 밍밍했다. 신성한 봉지라면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뽀글이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체로도 완결된 음식이지만 면만 따로 튀겨 과자도 만들어 판다. 따라서 라면은 어엿한 식재료이니 이 지면에서 다룰 자격이 충분하다. 설사 식재료가 설사 아니더라도 소재로서 자격이 빠지는 건 절대 아니다. 근 70년 가까이 동안 라면은 한국 최초의 현대화된 대량생산 음식으로서 우리의 주린 배를 늘 넉넉하게 채워주지 않았던가? 그 공로 하나만으로 라면은 차고 넘칠 만큼의 자격을 갖췄다.
비유가 적확한지 자신이 없지만 그 오랜 세월에 걸쳐 라면은 한국 식문화에서 공기 같은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다가도, 막상 어떤 국면에서 꼭 라면 아니면 안되겠다 싶을 때 없으면 부재가 치명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얼마나 많은 밤 혹은 새벽, 출출함을 달래고자 물을 끓였다가 라면의 부재를 확인하고 당혹감을 느꼈는지를. 요즘은 전지적인 편의점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춥고 또 간혹 눈도 내리는 겨울밤이라면 집과 편의점 사이의 거리가 지구와 다른 은하계처럼 멀리 느껴질 수 있다.
■라면의 다양한 조리법
이렇게 공기 같은 라면의 존재감을 최근 재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한 물리학과 교수의 ‘라면의 역사를 바꾼다’는 조리법 때문이었다. 라면을 찬물에 넣고 끓이기 시작해 물이 끓으면 불에서 내린다는 조리법은 에너지와 시간을 절감한다는 주장에 힘입어 인터넷 방방곡곡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전문분야가 또렷한 과학자의 의견이어서 그랬는지, 어쩌면 발화자의 의도와 바람보다도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 라면의 과학적 탐구는 의무 교육과정 수준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라면 조리법을 교양 과학의 차원에서 살펴 보았다.
① 냄비에 오래 끓이는 게 번거롭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냄비에 끓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있다. 용기면 말이다. 끓는 물을 붓는 것만으로 빨리 익을 수 있도록 용기면의 면발에는 전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역시 안도 모모후쿠가 1971년에 처음 개발했다.
② 냄비에 끓이지 않고 봉지라면을 먹고 싶은 이들을 위한 해법도 따로 있다. 앞서 언급한 ’뽀글이’말이다. 역사가 적어도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라면 조리법이다. 물론 뽀글이는 면발을 끓이기보다 불려 ‘알 덴테’로 익힌다는 측면에서 최선의 조리법은 아니다. 라면의 역사를 바꾼다는 조리법은 뽀글이에 더 가깝다.
③ 면발을 익히면 단지 물성 혹은 질감만 변하지 않는다. 국물에 잠겨 끓으며 스프의 맛이 면발에 배어드니 사실은 일석이조인 셈이다. 요즘은 잘 보이지 않지만 1980~90년대에는 양념이 된 면발을 내세우는 라면도 있었다. 따라서 봉지의 레시피가 알려주는 조리시간을 준수할 때 기준점으로 잡을 수 있는 맛의 라면을 끓일 수 있다.
④ 찬물에 라면을 끓이면 스프의 맛도 면발이며 국물에 덜 배어들 가능성이 높다. 스프는 기본적으로 지방+(고춧)가루 향신료이다. 따라서 뜨거운 물에 잘 녹고 맛도 더 잘 발달시킨다. 찬물이라면 덜 녹고 덜 발달된 국물이 면발에 충분치 않게 배어든다. 그 결과 라면 전체의 맛이 덜 발달될 수밖에 없다.
⑤ 라면봉지의 레시피는 식품공학등을 전공한 전문가가 실험을 거쳐 완성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런 레시피를 60년 이상 참고해왔다. “라면의 역사를 바꾸는” 조리법이 소위 ‘바이럴’이 되자 라면업계 실무자의 의견을 담은 기사가 나왔는데 말을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의 일에 전념하고 싶달까? 이론물리학과 물리화학을 필두로 한 식품공학은 우월을 따질 이유가 없는, 다른 분야일 뿐이다. 물론 라면에는 식품공학이 제 몫을 더 잘 한다.
⑥ 라면 조리 시간은 5분 안팎으로 짧다. 레시피를 따를 경우 고정된 수, 즉 상수이다. 물이 끓은 뒤 면발을 넣고 그 시간만 지켜준다면 제대로 라면을 끓여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가운데 라면을 찬물에 넣고 상태를 보아가며 끓인다면 조리 시간은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해 버린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불 옆에 붙어 있어야만 하니 번거롭다.
⑦ 인과관계를 아예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찬물에 끓여 더 효율적이고 맛도 좋아지는 라면이 있다면 이미 제조업체에서 내지 않았을까? 라면 시장은 과포화 상태이고 이삼십 년 묵은 ‘고인물’이 판매량의 수위권을 늘 차지한다. 언제나 치고 나갈 한 방을 노리고 있는 현실이니 그런 제품의 가능성을 업계에서 검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말하자면 최선이 아니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얼마든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어떻게든 자기 마음대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맞다. 다만 그 모든 나와 너, 우리의 조리법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봉지 뒷면의 레시피가 있음을 이번 기회를 빌어 환기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앞에서 라면을 한국 식문화의 공기에 비유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의식하지 않지만 ‘물 500(혹은 550)ml를 냄비에 담아 불에 올려 끓으면 면과 스프를 넣고 5분’이라는 한 줄이 없었더라면 그 모든 나만의 라면을 위한 조리법은 발걸음도 내디디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월이 흘러 2021년 2월이다. 1983년에 처음 라면을 끓여 먹은 아홉 살 아이는 쉰을 바라보는 중년이 됐다. 문풍지를 단단히 붙여도 웃풍이 살금살금 비집고 들어오는 방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때로 등골이 오싹해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 원고를 납품하고 끓여 먹을 라면 생각 덕분이다. 고작 편의점가 830원인 라면이지만 영하 10도를 넘보는 추운 겨울 밤, 한국인에게 라면보다 더 값진 재산이 무엇이겠는가.
물은 전기주전자에 끓여 계랑컵으로 달아 냄비에 채우고, 타이머로 레시피를 따라 시간을 맞춘다. 국물까지 다 먹을 요량이므로 계란은 한 개를 흰자와 노른자가 완전히 섞이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성글게 풀어 마지막 1분을 남기고 더한다. 라면의 세심한 맛을 위한 모든 길은 봉지 뒷면의 레시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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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