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로스쿨 존 마크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가 모두 공인된 매춘부이고 납치된 성노예가 아니다’는 주장을 했다. ‘국제법 경제리뷰’ 3월호에 실릴 이 논문에 하버드 역사학 교수들은 학문적 진실성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뉴욕을 비롯 미 전국의 한인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내고 논문 철회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제법 경제리뷰’는 현재 논문 내용을 조사 중이라고 했지만 하버드대 총장은 “ 개인의 생각이자 학문의 자유 ” 라고 답했다.
17일 하버드대 아시아태평양법대학생회 주최 온라인 세미나에 참여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오래 전 이렇게 증언했었다. “15살이 나던 해에 밤에 잠자고 있을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나를 끌고 갔다. 그 놈들은 내가 군인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더니 전기고문도 하고 칼로 찌르기도 했다....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일본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했고 상하이 지역에 위안소를 처음 세운이래 1937년 난징 대학살이후 더욱 확대시켰고 1941년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싱가포르와 필리핀, 미얀마 등 일본군 점령지마다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이 패망한 해방 후 자유를 찾았다.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고향에서도 버림받고 갈 곳이 없었다. 해방 후 혼란이 이어지더니 6.25 전쟁을 치렀고 전쟁직후에는 기지촌 여성들이 생겨났다.
‘ 환향녀 ’라는 단어가 있다. 인조 14년 청나라는 조선인 50만여명을 포로와 인질로 끌고 갔다. 납치된 서민, 양반, 아녀자들 중에는 몸값을 주고 풀려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정절을 잃고 돌아온 환향녀라 손가락질을 했고 자결이나 이혼을 요구받았다. 이에 인조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는 불문에 부친다고 했다.
이처럼, 미 군정시기나 초대정부 시절 일제하 최대 피해자인 위안부들의 생활 대책 마련을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고통과 수치의 과거라면서 정부와 국민 자체가 덮어버렸던 것이다. 위안부들은 숨어 살아야 했다. 그리고 46년이 흘렀다. 1991년 8월14일 ‘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는 기자회견은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사실을 공식증언하는 자리였다.
이번에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나오기까지 일본은 수십년간 공을 들였다. 1970년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하버드대에 100만달러를 기부, 일본을 연구하는 석좌교수 자리를 마련했고 매년 거액을 기부했다.
그 수혜자가 램지어 교수다. 우리가 하버드대에 미쓰비시로부터 그 돈 받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일본정부와 비정부 단체까지 총동원된 일본의 로비를 막을 방법도 없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One Left)’이 미국에서 2쇄에 들어간다. 내달 26일 출간되는 위안부관련 영문책 민병갑 재외한인사회연구소 소장의 ‘위안부: 군위안소, 잔혹성, 그리고 배상운동’(럿거스 유니버시티 프레스 출판)도 있다. 그동안 낮은 목소리, 귀향. 아이 캔 스피커, 허스토리 등등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나 다큐가 나왔지만 이보다 100배, 1,000배 정도의 노력과 성과물이 있어야 한다.
램지어 교수의 정식 명칭이 ‘미쓰비시 일본법학교수( Mitsubishi Prof 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이다. 한국기업들도 수퍼보울이나 뮤지엄 기부 외에 미 명문대에 장기적으로 삼성 교수, LG 교수, 현대 교수 등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가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본 후 쓴 시 ‘ 말하라’ 일부이다. “ 우리에게 남은 것들/ 결코 지워지지 않는 충격, 무임금, 상처들, 남자에 대한 증오, 자식도 없고 집도 없고 텅 빈 자궁, 술주정뱅이, 죄의식과 수치심, 아무 것도, 아무 것도...우리가 빼앗긴 것/ 봄, 내 삶,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들, 타락한 여자들, 정신대, 위안부… “
<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