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들은 왜 실패하는 걸까?”

2021-02-19 (금) 권정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그럴 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는 데 실패하는가?”

한국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가 말하는 ‘그럴 듯한 남성’이란 필시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며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싸우는, 가치관 반듯한 남성들. 의식 있는 그들조차 왜 성희롱/추행의 유혹에 무너지는가, 왜 여성 앞에만 서면 평소의 소신을 망각 하는가. 신세대 여성의원은 묻고 있다.

2018년 연말 활화산처럼 폭발한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성차별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반면 #미투 덕분에 성차별/희롱/추행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는 개선되었다. 과거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들이 이제는 사회 구성원들의 촘촘해진 의식의 망에 턱턱 걸리고 있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해 의미 있는 사건들이 터졌다.


우선 일본에서는 지난 12일 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사퇴했다. 올림픽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이자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올림픽 취소나 연기를 바라는 국민이 80%나 되는 상황에서 일대사건이 벌어졌다. 올림픽이 제대로 치러질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때 총리를 지낸 요시로(83)는 집권 자민당을 발판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온 정계 거물이다. 그런 그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밀려났다. 지난 3일 일본올림픽위원회(JOC) 임시 평의원회에서였다. 여성이사 증원 안건에 대해 그가 한 말이 여성폄하라는 비난을 몰고 왔다.

“여성이사를 늘린다면 (여성들) 발언시간을 제한하든지 해야지, 말을 한번하면 끝이 없어 성가시다”는 말이었다. 즉각 여성계와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날 사과를 하면서도 ‘이만한 일로 무슨’ 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일본은 성차별 문화가 깊은 나라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20 글로벌 성별격차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은 153개국 중 121위다. “일본은 여전히 늙은 남성 클럽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일본의 한 정치학자는 말한다. 남성지배적 문화 속에서 여성폄하 발언은 수시로 나왔고, 이제껏 그 때문에 사퇴한 정치인은 없었다. 하지만 구세대 남성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비난여론이 날로 거세지고 이에 토요타의 토요타 아키오 사장이 성명을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발언은) 우리 토요타가 중시해온 가치관과 다르다.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성명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당장 태도를 바꿨다. 토요타는 14개 톱 스폰서기업(올림픽 때마다 10억 달러 기부) 중 하나. 백전노장 요시로는 항복했다.

한국에서는 정의당의 당 대표가 동료의원을 성추행하고 사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권과 정의, 평등을 정체성으로 삼아온 정의당으로서는 당의 기반이 흔들리는 충격이다.

지난달 15일 김종철 대표는 장혜영 의원과 당무 상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성추행은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차량을 기다리던 중 발생했다고 피해자 장 의원은 지난달 25일 공개 입장문을 통해 밝혔다. 김 대표는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시인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주목받던 진보 정치인이 당 대표로 선출된 지 3개월 만에 어이없게 무너졌다.


여성비하로 올림픽위원장이 쫓겨나고 당대표가 물러날 때 하나를 더 보탠 사람이 있었다. 서울시장 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나선 우상호 의원이다. “박원순은 나의 롤 모델”이라며 고인이 된 박 전 시장을 선거판에 불러들였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박 전 시장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결론지었다.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을 보내는 등의 행동은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고인의 부인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남편의 무고함을 주장하자 우 의원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의 정책과 꿈을 계승하겠다,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는 글을 지난 10일 페이스북에 올렸다.

당내 박원순 영향력을 계산한 행동이었겠지만 패착이었다. 이번 보궐선거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 결과로 치러지는 것이고 여성들과 젊은 세대가 이 사안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롤 모델이라니, 피해자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등 비판이 쏟아지고 여성단체는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성희롱/추행에 대한 그의 안일한 인식이 초래한 자충수다.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는 데 그들은 왜 실패할까. 개인적 일탈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성차별적 조직문화의 영향이다. 여성에게 함부로 해도 남성은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럽게 봐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차별적 언사와 성추행을 양산해왔다.

이제 그런 분위기가 깨지고 있다. 젊은 세대의 가차 없는 지적 덕분이다. 과거 같으면 문제도 안 될 일들이 기어이 문제가 된다. 우리의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성차별 없는 사회에서 살게 하려면 지금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성차별 성추행은 잔인한 폭력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