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미국의 연방의회 난입 사건은 일부 나라들에겐 깨소금 같은 일이었다. 러시아도 그중 하나다. 마침 점거사태가 터진 1월6일은 율리우스력을 따르는 동방정교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동방정교 국가인 러시아에는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됐다.
러시아 대통령궁은 표정관리를 했다. 굳이 최고 통치자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의 내정”이라고 한 자락 깔았으나 “미국 선거인단 제도는 구닥다리”라는 멘트를 잊지 않았다. 그 다음, 날선 비판과 상처에 소금을 덧뿌리는 일은 정치인과 관영 매체에 주어진 일이었다.
러시아 상원격인 연방의회의 외교위원장은 이 사태를 ”민주주의 축제의 종언”이라고 선언했다. 친 크레믈린 언론들은 이 기조에 충실했다. 푸틴의 독재를 ‘자주적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라고 옹호하고, 각처의 민주화 시위를 CIA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하던 관영매체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반전기회였다.
선전선동의 단골 메뉴인 러시아 체제의 안정성과 질서가 다시 한 번 강조된 반면, 미국의 혼란과 무질서가 부각됐다. 미국 정치 지도자와 미디어들의 위선도 폭로됐다. 국영 러시아 TV는 시사 토크쇼 등을 통해 사태의 전말과 원인을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이들에 따르면 경찰국가인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탄압받았다. 특히 FBI가 난입 가담자 색출을 위해 서로를 밀고하게 하는 것은 스탈린 시대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구 소련의 개혁개방을 이끌다가 실각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 사태를 두고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존속할 수 있을 지 의문을 갖게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미국은 민주주의 모델인 적이 없었다”는 트윗도 나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한 미국 정치학자가 전하는 러시아의 이런 반응들을 보면 쓴 웃음이 나온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한국 영화에서만 나올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러시아 관변 매체의 비판 중에 눈길을 끄는 것도 없지 않다. “트럼프, 디지털 수용소에 감금”이 곧 그것이다. 트위트 등 각종 소셜미디어가 트럼프의 언로를 차단한 것을 빗댄 것이다. 이 때 사용된 ‘수용소’, 굴락(gulac)은 스탈린 시대의 강제 수용소를 말한다. 국가 통제 아래 있는 러시아 매체들이 쏟아낸 미국 비판은 선전선동의 차원을 벗어난 것이 아니지만 러시아 반체제 진영에서도 이 부분에는 비판을 같이 했다.
가까스로 독살 위기를 넘긴 후 얼마 전 귀국하자 말자 수감된 러시아 반체제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또한 소셜 미디어의 트럼프 차단을 비판하고 나섰다. 푸틴도 이를 흉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례가 언론 통제와 검열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의회 난입사태 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미국의 소셜 미디어들은 순식간에 현직 대통령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박탈해 버렸다. 트럼프 진영에서 대안으로 생각했던 극우 소셜미디어 팔러는 아마존이 웹 호스팅 서비스를 중단했다. 팔러는 애플과 구글 앱 스토어에서도 퇴출됐다.
이들 기업들이 트럼프의 입에 덕 테이프를 붙인 것은 아니지만 그 앞에 놓인 마이크의 전원은 꺼버린 것이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과 행보는 주류 언론의 선별 보도로 간추려 전해졌을 뿐 그가 외면했던 만큼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평가는 다른 측면에서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대기업의 정치적 파워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이 될 수 있다.
여태껏 기업들은 돈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지금도 GM, 월마트, 맥도널드 등 대다수 기업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자금은 끊어지면 다른 자금원을 찾을 수도 있다. 이번 테크 기업들의 조처는 차원이 달랐다. 효력은 즉각, 전면적으로 발휘됐고, 대안은 없었다. 의사당 난입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 후 힘이 빠지고 허세만 남아 있던 트럼프는 일부 테크 기업들에 의해 마지막 무장해제를 당했다.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 소프트 등은 5대 빅 테크로 꼽힌다. ‘트럼프 아웃’ 결정을 내린 것은 몇몇 관련기업의 중역들이었다. 대통령을 하루만에 ‘디지털 수용소’에 가둘 수 있는 파워가 이들의 손에 있었다. 이들 빅 파이브에 테슬라 정도를 더하면 S&P 500 지수에 포함된 500대 대기업의 자산 총액 가운데 25%를 차지할 정도로 이들의 경제적 파워 또한 막강하다.
문제는 현 상태가 유지되면 이 칼날이 누구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누구, 혹은 무엇인가가 다음 타겟이 될 수 있다. 지금껏 상대해 보지 못했던 위험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대책은 모색되겠으나 이들은 지금 정치적인 승자들과 함께 있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롭게 대두된 이 위협은 러시아 관영매체가 아니라 미국민들이 바짝 정신 차리고 지켜봐야 할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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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