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회도 없고, 눈물도 없고, 추억도 없는 여자
오페라 공연이나 정장에 착용하는 Patek Phillippe은 내가 가장 아끼는 시계다.
이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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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
우리 부부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감성적이며 그녀는 이성적이다. 그녀는 나를 ‘오뚝이’라고 부르며 나는 그녀를 ‘곰탱이’라 부른다. 나는 매사가 진취적이며 급진적인 반면 그녀는 보수적이며 여유가 넘쳐난다. 나는 항상 돈 벌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돈 벌어오라는 적이 없다.
그런 반면 나는 미술관, 박물관 또는 도서관에 들어가면 기본이 5~6시간이며 설명서들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녀는 1시간을 못 견딘다. 나는 모든 예술에 관심이 지대하고 명품을 좋아하는 반면 그녀는 음악, 영화, 미술, 그 어느 장르 하나 기억하는 것이 없고 사람 이름은 모두 혼동하고 헷갈린다. 폴 뉴먼과 찰톤 헤스턴을 혼동하기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에 신경 쓰냐며 오히려 나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10년간 국립 오페라의 케네디 센터에 지정 좌석을 선불 예약하여 턱시도를 차려 입고 그녀와 관람했었다. 하지만 공연 도중 그녀가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나만 좋다고 밀어붙이는 일은 자중해야겠다 싶어 그 후로 계약을 취소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왜 더 이상 오페라 안 가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그동안 관람했던 수많은 오페라 중 단 한 명의 테너나 소프라노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니 “자기야. 날 뭘로 보고… 그 유명한 퉁퉁하고 잘생긴 남자…” 하며 결국 이름을 못됐다. 그러면 단 한 편의 오페라 제목이라도 말해보라고 하자 “자기 나 지금 놀리지? 그 유명한 ‘이태리 이발사’ 있잖아!”
내 서재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는 Playbill들과 사용한 입장권들만이 묵묵히 증언해줄 뿐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시계는 Patek Philipp이지만 담담한 모습일 뿐 화려한 자태는 아니다. 내 와이프가 딱 그 모습이다. 하지만 매사에 민감한 사람과 우둔해 보이는 사람끼리 같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 명품 싫어하며 날 속물 취급하던 여인
독자 분들은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나는 물건에 남다른 애착이 많다. 수집을 좋아하고 골동품(antique)과 명품 쇼핑을 즐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처음 와이프를 만났을 때 그녀는 명품을 경멸했고 명품 쇼핑하는 사람들을 모자란 사람들이라 치부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은행 예금과 부동산 같은 확실한 자산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던 상점은 ‘Eddie Bauer’와 T. J Max.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로 자신에게 재투자하고 그로 인한 만족감에 노력과 동기부여에 좋다고 생각했다.
돈 있는 사람이라 해도 구차한 모습은 싫었다. 또한 명품이란 대체적으로 디자인과 품질이 좋다. 집, 차 할 것 없이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좋고 비싼 물건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단지 과소비는 안 된다. 재벌들과 달리 일반 서민들은 거액의 미술품을 거실에 걸어놓고 즐길 수도 없으며 휴양 별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경제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자신을 품위있게 포장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편의 입장에서 돈 벌어서 어디에 쓰겠는가? 와이프에게 투자하고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한 만족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그녀의 빨간 밑창 신발에서 티파니 귀고리까지 거의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해 주고 사주었다.
그런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고 부부는 닮아간다고 요즘은 아내가 명품을 나보다 더 좋아한다. 그러면 내가 놀린다 “이거 명품이야! 자기가 이런 거 사면 사람들이 흉 본다고 그랬잖아.”
그녀는 눈을 밑으로 깔며 “거짓말만 하고 있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부부 일심동체라고는 하나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사는 명품은 명품이 아닌가보다.
# 경기여고 낙방한 아내
나는 단 한 번도 아내가 우는 모습이나 감정에 복받친 모습을 본적이 없다. 아내는 내 스토리를 읽으며 한 편의 드라마 같다고 남 애기하듯 말했다.
“자기 참, 힘들게 살았네.”
그래서 그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체험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았다. 한참을 뜸들이던 그녀는 특별히 힘든 경험이 없었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인생 살면서 그래도 한 번은 힘든 고통이나 고난이 있었겠지 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한참 생각하던 그녀가 경기여고에 시험 보고 떨어져서 낙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합격하리라 굳게 믿었단다. 그렇다. 그녀의 가장 가슴 아팠던 추억이란 그 정도다. 그 후 이차 시험을 쳐 명동에 있던 계성 여고에 합격한 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치열했던 입사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한 후 연방 정부에서 35년간 진급에 진급을 거듭하고 훈장까지 받았다. 원만한 직장생활 그리고 고위직에서 은퇴했으니 실패와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모든 결과가 결국은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인생에서는 잘돼도 내 탓, 잘못돼도 내 탓 아니냐며 교과서 같은 대답만 한다.
# 종업원들도 모르는 세탁소 여주인
그러면서 남편 덕분에 평생 생각에도 없던 세탁소 바느질도 하고 있다며 웃는다. 그녀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니 세탁소 하는 부부 중에 세탁소 안찾아오는 와이프는 우리 아내 밖에 없는 듯하다.
그녀는 직장 은퇴 후에야 픽업 스토어들을 돌며 매상을 거두고 일거리를 돕기 시작했지 첫 10여년은 종업원들이 여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지금도 공장 종업원 다수가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
그런데 모르는 게 약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아름다운 마음(A Beautiful Mind)’은 정신분열증 환자였음에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잔 내쉬 프린스턴대 교수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담고 있다.
왜 천재 수학자의 스토리를 전하면서 ‘훌륭한 마음(A Brilliant Mind)이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내쉬 교수의 천재성도 그 아내의 아름다운 마음 없이는 밤하늘에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Shooting star)에 불과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영화의 주제는 Nash’ Equilibrium이라는 천재성 수학 이론이 아닌 상아탑 변방에서 방황했던 외로운 학자를 끝없이 사랑한 여인의 스토리인 것이다. 나의 작은 인생 스토리 뒷면에, 아니 여러분 모두의 곁에는 내쉬 부인과 같은 ‘아름다움과 훌륭한 마음’이 있기에 우리 모두 행운아인 것이다.
# 이 칼럼의 산모
20년 전 만났던 그녀는 내게 못다 한 교육을 하라며 꾸준히 추천했으나 이미 ‘때’를 놓쳤다고 생각했던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나에게는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10년 후 사업이 자리 잡히자 또다시 그녀가 대학에 등록하라고 제안했다. 형설지공 후 4년 전 핑크색 벚꽃 휘날리던 봄날 내셔널 몰에서 조지 워싱턴 대학 졸업장을 받아드니 지나간 세월 부모님이 ‘공부는 때가 있다’라 말씀하시던 추억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했다.
졸업생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주위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어 카메라 포즈를 취하는데 와이프의 모습이 안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와이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참 사랑이란 그런 것 아닐까. 남 몰래 훔치는 눈물. 그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번 울어본 기억이 없다던 그녀는 타인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작년 여름 조지타운대 석사 학위도 수여 받고 나니 그녀가 이제는 인생을 잘 정리해 나가자고 했다. 이 칼럼을 쓰기 시작한 동기 부여도 그녀에게서 비롯됐다. 아내 분들은 모두 명품이며 진품이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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