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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 백남준과 코로나 시대

2021-01-29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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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9일은 백남준(1932년 7월20일~2006년 1월29일) 선생의 서거 15주기이다. 한국에서 출생한 자로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전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직장 상사와 동료, 일가친척, 친구들을 SNS를 통해 만난다. 단체의 총회나 세미나. 학교수업, 교회 예배, 모든 만남이 비대면 웹사이트로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 아침에 눈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열고 페이스 북, 트윗, 줌, 유튜브, 랜선 같은 단어들이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로 모임과 대면 관계가 사라지고 컴퓨터 모바일 기기를 통한 온라인으로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TV를 들고 전세계를 유랑하며 ‘참여와 소통’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우리는 열린 회로(세상)속에 있다,” 며 코로나 팬데믹 같은 갇힌 시대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내다봤다.‘

21세기는 디지털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매드( Digital Nomad) 시대 ’라는 말이 있다. 백남준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노매드 시대를 실천했다.

백남준은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TV’에 TV13대와, 피아노, 소음기를 배치했고 피아노 1대를 해체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과 음악, 퍼포먼스를 함께 했고 1965년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한 것이 세계최초의 비디오 아트다.

한국에 ‘백남준’ 이란 이름을 알린 것은 1984년 뉴욕-파리- 베를린- 서울을 최초로 위성중계 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자고속도로’ 발상은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인터넷과 SNS 시대를 예견했던 것. “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 ”이란 백남준의 말 그대로다.

올 1월29일 백남준 작고15주기를 맞아 한국의 백남준 아트센터는 그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대담을 26일과 29일 진행했다. 당연히 줌을 이용한 온라인 화상회의 방식이다.
백남준은 뉴욕에서 40년간 살면서 장례식도 맨하탄에서 치러졌다.

본인은 백남준과 같은 뉴욕 하늘아래 살면서 구겐하임미술관, 뉴욕한국문화원 등의 전시회나 퍼포먼스를 통해 그를 볼 수 있었고 맨하탄 머서스트릿 제리식당에서 기자로써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영광이었다.

백남준 작고 2년 후에 문을 연 한국의 백남준 아트센터가 전시회 및 강연회를 수시로 열고 있지만 뉴욕에서도 백남준 추모특별전이 수시로 열린다.


그런데, 백남준이란 천재를 배출한 한국, 유학생활과 교수를 지낸 독일을 제외하고 40년을 산 미국에서 백남준 연구 서적은 별로 없고 세계곳곳 전시 도록만 남아있어 아쉽다. 더구나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그의 발자취가 확연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한인화가들이 가난한 칩거생활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이 모이는 전시회를 열 수 없는데다가 온라인 전시회는 그냥 지나가는 그림이 될 뿐 실질적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려서만 풍족하게 살았지 미국에 온 후 수십년간 경제적으로 고초를 겪었던 백남준은 한국 방문 시 이런 말을 했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떠도는 문화상이다.”

오늘날 방탄소년단이 전세계 아미 팬을 갖고 있고 천문학적 숫자의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을 알면 그는 “거봐, 내 말 맞지. 문화도 수출이야”하고 박장대소 할 것이다.

현재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인작가들도 긴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혼자 사유하고 공부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미래를 내다보는 이런 작가가 그들 중 나올 것이라고 기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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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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