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다 거는 것(All In)이다
결혼한다는 것은 한 여인에게 인생을 걸고 내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결혼을 두 번 경험한 사람으로서 나름의 철학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겠다. 결혼에 ‘실패’했다고 말하시는 분들 과연 ‘실패’일까? 내 재혼 생활이 행복하기에 이혼이란 ‘새 길’을 찾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다 말하고 싶다. 싫으면 이혼하라는 무책임한 말은 아니다. 결혼에는 책임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젊은 부부가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며 벽돌을 하나씩 쌓아 나가는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허나 젊은 시절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내 길이 우리 가정의 길이었다. 내 스스로 선장임을 선언했으면 오차 없이 항해를 잘 해야 한다.
또한 수동적인 분이라도 버스에 올라탔는데 ‘아차’ 실수로 행선지와 목적지가 다른 버스에 타버렸다면 빨리 내려서 가고자 하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본인만이 안다. “목적지를 모르면 어디든 상관없다”란 말이 있다. 인생의 목적지를 잘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는 목적지를 같이하는 동반자다. ‘동치미’에 자주 등장하는 메뉴감이 신랑의 직업이다. 검사, 의사, 재력가들이 최고의 신랑감으로 평점을 받는다. 무임승차하자는 뜻이라면 절대 동등한 위치에서 살수 없고 배우자의 직업 또는 재산이 날아간다면 무슨 낙으로 살 것인가? 그래서 사람이 우선이다.
#악의 꽃
모든 불행의 시작은 숨김에서 오고 악의 꽃은 어둠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 방학 때 시골 외가댁에서 외할머니가 끄시는 수레를 양쪽 뒤에서 사촌과 둘이서 신작로에서 밀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열심히 밀었지만 힘들어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미는 척 했지만 힘은 안주고 걷기만 했다. 묵묵히 집에 다다른 할머니가 수레가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중심잡고 조절하기 힘드셨다고 말씀하셨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창피했다. 결혼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말없이 본분을 다하느냐 아니면 하는 척 하느냐의 차이다. 불치의 병마가 안 보이는 곳에서 시작되듯 파탄의 씨앗은 불신에 심어지고 기만에서 싹튼다. 외할머니는 대쪽 같은 성격에 모든 삶에서 숨김이 없었다. 100수를 바라보는 나이에 운명을 달리 하셨지만 꼬부랑 할머니는 집안에서 존경과 믿음의 화신이었다. 집에서의 남자란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여백 없는 기관차
결혼생활이란 남자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처자식 거두는 것이라 믿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말단 형사 시절 오버타임을 너무 많이 해서 경찰국장보다 연봉이 더 많았고 매번 진급했으며 젊은 나이에 집을 장만해서 가정을 꾸렸다. 외로움의 또 다른 말은 일 중독이다. 단 한번 전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진지한 대화를 못했다. 쌓아 올린 아성이 무너진 것은 공무원 직장을 잃으면서였다.
17년간 이란 여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단 한 번도 불편함을 느끼며 살지 않았지만 지위와 명예를 상실하자 문화와 언어에서 오는 차이점이 이방인처럼 다가왔다. 밖으로 돌며 자신의 참모습을 외면한 채 아니 정당화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 모습은 어둠에 핀 꽃과 같고 여백 없는 기관차같이 달리기만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한국여자를 배우자 상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집안 환경을 중시하는 결혼 조건과 절차들이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방인’들이 개방적이었다. 전처가 제시한 이혼장에 순순히 사인한 순간 나는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전처에게 넘겼고 딸들의 대학 학비와 위자료로 70만달러의 빚더미를 안았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 내 지문들은 하나씩 내 손끝을 떠나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문이 사라지고 나는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아이들이나 전처 앞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가끔 보는 전처 식구들도 우리(나 와 와이프)에게 과할 정도로 잘한다.
#두 번 다시 없던 연락 그리고 2001년도 파티
이혼 후 그 어렵던 시절 나는 허울 좋은 모습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자신감을 잃은 남자는 최악이며 비굴 해지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었다. 비루한 삶에서 선비와 같은 위상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살고자하는 노력이 보였는지 한 유명 대학교수라는 돌싱 여성을 소개받았다. 호감이 갔으나 좋은 만남과 달리 더 이상 연락이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한 해가 저물던 2001년 힐튼에서 개최 되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 세탁협회장으로 참석하였다. 행사 말미 흥겨운 댄스 시간에 초면의 흰 드레스 여인과 얼떨결에 파트너가 되었다.
‘Kiss and say goodbye’ 곡에 손과 허리를 잡고 춤을 추는 동안 그녀의 머리결이 내 뺨에 와 닿았다. 그 촉감이 꽃 잎새 같았고 머리결에 이는 미세한 감전과도 같았다. 음악은 멈추고 우리의 손끝이 서로 이별을 고했고 이름도 모른 채 헤어졌다. 성인이 되어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혈이 통하는 설렘을 안다. 거부할 수 없는 자석 의 끌림과 마법의 힘이 존재함도 안다.
다만 본심을 내 보이고 싶지 않다. 아픔을 아니까. 그렇게 헤어지고 계속 그녀 생각이 구름처럼 머리 위에 떠있었지만 고개를 휘저으며 일에 몰두했다. 우연히 한인회 모임에 참석한 그녀를 또 다시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고 연락처를 교환 하지도 못한 채 또 다시 헤어졌다.
#주차장에서 한 맨 처음 고백
다섯 번을 계속 우연히 매번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 또 다시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마주친 나는 주차장에서 얼떨결에 맨 처음 고백을 했고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녀가 쿨(cool) 하게 받아주었다. 그녀는 나와 190도 다른 삶을 살아온 여자였고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든 상대였다. 왜 그녀를 그리도 좋아했는지 모른다. 식당 예약을 잡고 전화하니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자고 제안했다.
깔끔한 그녀의 타운 하우스에서 내게 야심차게 선보인 그녀의 디너는 딱딱하게 굳어서 칼도 안 먹히는 돼지고기 요리(Pork Chop)였다. 외국 여자와 살다 헤어 진후 처음 만난 한국여인에게 기대가 있었다면 무엇이겠는가?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팔자에 집에서 한식 먹을 생각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와인 잔을 앞에 하고 밤은 깊어갔다. 남녀가 마주하고 있으면 뜨거운 폭죽이 작렬하기 마련이다. 즐겁게 웃던 미소와 유머를 거두고 더 이상 진전되기 전에 할 이야기가 있다며 고백했다. 나의 가장 치욕스럽던 순간과 전과기록 그리고 내 현재의 처지를 한 점 숨김없이 다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연락을 안 한다 해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전과자’라면 사회악이라 치부했던 그녀였다. 꿈, 내 꿈을 말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내 모든 허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녀가 작은 손을 뻗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갔던 계단은 나에게는 제곱의 계단과도 같은 구원의 창이었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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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