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토니 라빈스가 쓴 Power of Question(질문의 위대함)에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Stanislavsky Lech(스테니슬라브스키 레히)의 생존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다. 가족들이 가스실에서 죽어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직후 순간순간 죽음의 악몽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도 이제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체념을 질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곳에 살아날 수 있을까? 묻고 또 물었다.
그가 갇힌 수용소 상황에서는 살아날 수 있는 탈출은 절대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언제? 살아날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어쩌면 질문이 끝나는 것은 곧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겹겹이 둘린 철조망과 사방에 깔린 무장 경비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망은 커녕 숨쉬는 것 조차도 불편했다.
모든 난민들은 희망의 질문들을 아예 포기하고 연명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를 체념하고들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살아날 희망의 위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질문은 곧 해답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탈출의 길이 보였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가스실에서 죽은 시신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보였다. 그는 어느 날 어둠을 이용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시체들 속에 몸을 숨겼다. 썩어 악취가 나는 시신에 코를 박고 맨 살을 섞고서 눈을 감은 숨만 쉬는 시체가 되었다.
잠시 후 트럭에 시동이 걸렸고 덜컹거렸다. 트럭의 시동소리는 그에게 생명의 신호였고 희망의 출발이었다. 한참을 달려간 트럭은 큰 구덩이에 시체들을 쏟아 부었다. 살아있는 시체가 된 자신도 쏟아지는 시체들 속에서 함께 구덩이에 부어졌다. 트럭은 떠났고 인적이 없는 깜깜한 밤을 기다렸다가 그는 알몸의 시체를 일으켜 25마일(40Km)을 달렸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희망은 생명으로 이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질문을 놓쳐서는 안된다. 희망의 질문은 곧 생명이고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새해가 되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히 강세라고 한다. 바이러스 백신이 시민들에게 돌아올 차례는 아직도 요원하다. 어떤 도전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절망이고 절망은 곧 죽음을 부른다.
50대 중반의 K집사가 맨하탄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몸에 전혀 이상은 없었는데 의료 보험에 가입하고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한 군데 정밀 검사를 위해서 입원했다고 한다.
위로 차 병실을 찾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안색이나 낙천적인 유머감각도 여전했다. 오히려 환자가 방문객들을 위로하면서 별 것 아닌데 찾아준 부담감을 감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그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 ‘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곧 남편의 죽음을 알아차렸다.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저녁까지 웃게 만들어 주었던 강건한 사람이 어찌? 왜?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어젯밤 검사 결과를 듣는 순간에 그는 낙심했다.
사람의 생명이 질기기로 치면 무쇠보다 강하지만 허무할 땐 마치 물거품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 펼쳐질 새해에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라! 오히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전능자에게 맡기고 역경을 감사의 기회로 바꾸기를 축복한다. 희망이 곧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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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열/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