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한반에 학생수가 100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책상수가 모자라 두개의 책상과 의자를 붙이고 세 명이 함께 앉아 수업을 받았고, 그것도 부족해 오전 오후 2부제를 넘어 3부제로 수업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게 꽉 찬 교실인데도 맨 뒤에는 늘 따로 한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나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던 언니를 위한 자리인데 광풍급 치맛바람 엄마의 배려로 콩나물 교실에서도 도우미 언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는 것부터 단장하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의 모든 일에 관여를 하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게 그 언니의 역할이었다. 지금은 그 언니의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그때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한번은 준비물을 잊어버리고 학교에 갔을 때였다. 선생님이 준비물 검사를 하시며 잊어버리고 온 아이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 한명씩 이유를 물으며 야단을 치셨다. 드디어 가슴 졸이고 있던 내 차례가 왔고 주눅이 들어 이유도 대지 못하고 있던 그때 언니가 끼어들어 내 대신 이유를 댔고 그 덕분에 나는 선생님의 야단을 피할 수 있었다.
나를 돌보는 것이 일이었던 그 언니는 본인이 챙겨야했는데 못했기 때문에 나의 잘못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고 선생님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선생님도 장애가 있는 나를 야단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핑계가 있어 피하고 싶었던 마음인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난 그것이 아주 싫었다. 남과 똑같이 야단을 맞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장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어른들의 결정과 보호를 피할 길이 없었다. 언니가 없을 때에는 남자 아이들의 놀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언니는 그것을 알고 화장실에 갈 때나 운동장에서 놀 때도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놀림이 싫기는 했지만 아이들과 떠들고 놀 수 있는 기회까지 빼앗겼고 난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다.
지금은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그 당시를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 왜냐면 요즘은 한국에도 특수교육의 보조교사제도가 생겼지만 오래전부터 미국에는 교사 이외에 보조교사가 늘 배치되어 있고 장애가 심한 경우에는 개인보조교사를 마련해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장애가 있는 자녀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개인적인 도움을 챙겨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인보조교사를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어 학습효과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대일 보조교사가 특수교사 이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애의 정도를 이해하고 개별 아동에게 필요한 보조의 정도를 탄력적으로 변화해가며 도울 수 있기 전에는 부모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조교사의 경우에도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타고난 재능으로 장애학생을 지도하고 도와줄 능력과 경험을 풍부하게 가진 훌륭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보조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읽고 쓰기와 셈하는 자격만 갖추면 된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정도의 교육을 받고 배치되기도 한다.
베테랑 교사와 함께 협력하며 좋은 교육경험을 쌓아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동문제를 가진 학생의 행동을 저지하거나 따라 하기 힘든 학습활동을 대신하며 돕는 것이 기본책임이기 때문에 장애학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와 사회성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고, 장애가 심한 경우에는 오히려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무조건 개인보조교사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2-3명을 함께 돕게 하거나 보조교사의 활동을 잘 관찰하고 부모가 담임교사와 협력을 지속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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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칼스테이트 LA 특수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