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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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시간여행 31. 시계 이야기 #24: 미키마우스 시계

2021-01-04 (월)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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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영웅은 죽었다

제프의 시간여행 31. 시계 이야기 #24: 미키마우스 시계
제프의 시간여행 31. 시계 이야기 #24: 미키마우스 시계

1986년 은행강도를 검거했던 공훈으로 경찰국장 표창과 $38.50포상금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목숨을 내걸고 범인을 체포했던 공훈으로 받은 이 수표는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제프의 시간여행 31. 시계 이야기 #24: 미키마우스 시계

디즈니 월드에 여행 갔다 딸아이에게 선물했던 Mickey Mouse Watch. 순수함과 열정이 항상 우리의 마음이기를 기원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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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박눈
혹독한 한해를 보내는 끝자락에 서서 맞이한 지난 크리스마스만큼은 함박눈이 내려주기를 고대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종일 칼바람에 휘날리던 겨울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 긴 춤을 멈추고 커피를 뽑는 아침 시각에 가는 눈발들이 잊었던 할머니 머릿결 같이 허공에 맴돌았다. 오늘밤 함박눈이 서러움을 잠재우듯 쌓여준다면 푹푹 빠지는 발자취를 남기며 걷고 싶다. 그렇게 걷다 잃어버린 어느 길에선가 뒤돌아보면 멀리도 걸어온 내 발자취에 혼자 울컥하겠지….


# Dont be a H.E.R.O.
나를 현장 교육시켰던 고참 경관(Master Patrol Officer Hilegas)은 독일 병정 같은 사람이었다. 35년 경력의 그는 3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1)비를 맞고 다니지 말고 따뜻하게 근무해라 2) 정시에 출퇴근해라 3)영웅이 되려하지 마라. 마치 부모님들이 자식에게나 할 법한 훈시 아닌가? 오랜 내공에서 묻어나오는 진리들이란 사실 아주 간단한 상식 수준들이다.

경찰 일이란 사계절을 밖에서 보내는 직업이다. 비에 젖고 추위에 독감 들면 일을 할 수 없고 출근이 늦으면 상관들과 동료들에게 미움 받고 퇴근이 늦으면 가정불화가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웅이 되려 하는 이는 본인이 죽거나 동료를 죽이게 된다.
내 공직생활에서 13명의 동료 경찰관의 숭고한 목숨이 희생되는 것을 경험했고 그 중에서도 같은 과 소속이었던 케빈 웰시(Kevin Welsh: 08-04-86)와 제이슨 화이트(Jason White: 12-30-89)의 순간적이며 비극적 죽음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그러나 나는 생과 사를 걱정하며 살지는 않았다. 20년이 넘는 경찰 생활에서 범죄 앞에서 단 한번 주저해 본적이 없다.

# 차이나타운 은행의 고집
86년 겨울 눈 폭탄에 길이 마비 돼서 경찰차 바퀴에 쇠 체인을 감고 순찰 돌던 중 차이나타운에 은행 강도가 들었다는 교환수 음성이 무전기에서 급박하게 나왔다. 중국 상인들은 현금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루머 때문이었는지 중국인들을 상대하는 차이나타운에 소재한 작은 은행은 강도들에 의해 자주 털렸다.
그러나 지점장은 은행에 방탄 보호막 하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손님들에 불편을 주며, 예금액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어서였다. 시민들이 경찰을 부르면 너무 더디게 온다고 야단하지만 그 이유는 선착순으로 경찰을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로 보내기 때문이다.

# 영화 많이 본 은행 강도
은행 뒷문 쪽에 도착했을 때는 범인 한 명은 아직 은행 내에, 다른 한 명은 도주 차량에, 또 한 명은 은행 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었는데 나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Smith and Wesson(6연발 38구경)을 뽑아든 나를 보자 도주차가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달아나버렸다. 급히 무전기로 차량을 동료들에게 알리는데 손에 검은 리볼버(Revolver) 권총을 들고 문 앞에서 망보던 녀석이 당황해하며 말로 가구(Marlo Furniture) 상점 쪽으로 달아났다.

내 본능은 그를 쫓고 싶었지만 은행 안에 있는 직원들과 손님들의 안전을 우선 점검해야 했다. 그래서 무전기로 범인의 신상을 알려주며 유리창 넘어 은행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장총을 손에 거머쥔 범인이 은행 직원의 목을 감아쥐고 무엇인가 협박을 하다 망보던 동료가 사라진 것을 알고는 급히 바닥의 돈 자루를 집어 들며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때까지 내 백업(Back up)이 도착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결단이 필요했다. 녀석이 밖으로 나오기 전 내가 은행에 진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고 인질극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오면 길가의 행인들(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안중에도 없이 유유히 보도 위를 걸어 다녔다)의 안전이 보장 안됐고 또한 도주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문 앞에서 도주차를 찾고 있는 순간 뒤에서 총을 겨누며 “경찰이다 총을 놔” 하며 소리 질렀지만 범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녀석인지 내 명령에 전혀 개의치 않고 보도를 뛰었다.

# 돈 가방에서 터진 블루 잉크 폭탄
도망자의 발은 추적자의 발보다 빠르다. 더 절박한 사람 발이 빠르게 마련이다. 네 블락을 달려 3rd St 에서 갑자기 ‘펑’ 하며 그가 들고 있던 돈 가방이 터지며 종이돈이 공중에 날렸고 파란색의 잉크가 그의 윗도리와 손을 물들였다. 그래도 돈 가방을 버리지 않고 좁은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정신없이 달리던 내 발걸음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무전기로 내 장소를 알리자 정신없이 달린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 고층 오피스 건물 숲을 이룬 현 모습과 달리 당시에는 2-3층 타운하우스와 전당포 등의 가게들이 즐비했던 거리 뒷골목에는 쓰레기통들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숨이 차 죽을 지경인데 그 역시 기진맥진 했을 것 같았다. 일단 무전기 볼륨을 줄이고 귀를 땅바닥에 대니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맴 맴’ 하며 나를 찾는 듯 들렸다.


# 은행 강도와의 대치
의도적이며 조용한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앞으로 전진하며 사방을 둘러보는데 이층 유리창에서 한 꼬마가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내가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 대며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주니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큰 쓰레기통 하나를 지목했다. 불과 10여 미터 사이다.
“I know you are there, put your hands up and come out slowly.”

내가 소리쳤는데 거의 동시에 범인이 용수철 마냥 뛰어나오며 그의 장총이 불을 뿜었다. 당신은 총을 맞아본 경험이 있는가? 화상을 입는 기분이었다. 오른쪽 무릎이 뜨끈했다. 반자동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녀석은 구부러진 골목 귀퉁이를 돌고난 후였다. 그러나 그가 골목 끝에서 마주친 것은 자유가 아닌 나의 용감한 동료들이었고 다리를 절면서 뒤따라간 나는 결국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했다. 나는 근무 중에 모두 세 번 병원 신세를 졌는데 이 사건이 그중 첫 번째였고 그나마 가장 경미한 부상이었다. 범인 세 명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들은 법원에서 중형을 선고 받았다.

# 포상금 수표 $38.50
3개월 후 나는 경찰국장 최고 훈장을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받았다. 2개월 후에는 포상금 수표가 도착했다며 서장이 내게 건네주었다. 포상금 액수를 본 Hilegas 선배는 내 어깨를 툭 쳐주면서 “영웅이 되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1986년, 그때 왜 은행에 입금을 하지 않고 여태껏 그 수표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우린 딸아이 손을 잡고 첫 디즈니 여행을 가서는 딸에게 사주었던 미키 마우스 시계처럼 한순간 순수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에게 그 수표의 의미는 ‘시민 케인’에 등장하는 ‘Rosebud’과 같은 미스터리인가.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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