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도 그림이 내게로 온다

2020-12-22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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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모든 제한에서 해방되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지 그림이 내가 되는 건지 어느 순간 합일된 경지에 이른다. 캔버스 앞에 앉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이제 노쇠하고 고단한 이 육체와 영혼에는 그리고 싶다는 열망 외에 남은 것이 없다. 오늘도 그림이 내게로 온다.”

열흘 전 향년 86세로 타계한 ‘물의 화가’ 안영일 자서전의 한 구절이자 책 제목이다. 네 살 때부터 그리기 시작해 6세에 첫 전시회를 가졌으니 80년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그림만 그린 분이다. 선생님을 찾아갈 때마다 늘 캔버스 앞에 앉아계셨다. 일체의 사교생활이나 사회활동 없이 스튜디오에 칩거해 색과 빛을 켜켜이 쌓아 ‘물’의 변주곡을 빚어내었다.

그는 70대 후반에 목뼈 6개를 모두 제거하고 타이태늄으로 대체하는 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2013년에는 뇌졸중으로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회복된 중환자였다. 말이 어눌하고 신체적으로 많이 부자유스런 상태였지만 놀랍게도 그림 그리는 기능만은 살아남았다. 아니, 다른 모든 기능을 멈추고 그 에너지를 다 모아 그리는 일에만 쏟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기적이라 할 몸으로 80x90 인치 대작을 완성하는 모습은 ‘초인’과도 같았다.


다음은 안영일 자서전의 권말에 내가 쓴 서평의 일부다.

“1987년과 1988년 LA 아트페어에서 안영일 초대전이 열렸다. 미국 아트페어에 처음 나온 현대화랑 대표가 안영일 화백을 모시고 신문사를 찾아왔을 때 나는 3년차 문화부 기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즉각 거장을 만났다고 느꼈다. 그리고 처음 본 순간부터 작가와 작품들에 완전히 압도됐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물’을 만났다고 상상해보라. 캔버스 가득히 미세한 사각의 점들이 빈틈없이 들어차있는 그림들은 그제껏 내가 보아온 어떤 서양화와도 달랐다. 광대한 바다와 태양이 응축된 작은 입자들이 촘촘하고 정교하게 집약되어 쌓인 거대한 캔버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두려움과 경이의 공간이었다. 가장 세밀한 구상이면서 가장 현란한 추상이었고, 물^빛^생명^영혼의 입자가 우주의 파동처럼 다가왔다. 그 그림들의 진정한 가치와 평가가 30년 후에나 이루어져 라크마(LACMA)와 같은 굴지의 미술관에 걸리게 될 줄은 그 시절에 나도, 작가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화가 안영일은 한국의 서양미술사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해왔다. 일본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하여 미국으로 나아간 화가. 고등학생 때 국전에 특선했고, 서울대 미대생이던 1957년 미 국무성 주최 국제공모전 작가로 선정됐으며, 59년 시카고 헐 하우스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니, 모르긴 해도 해외에서 인정받고 초대전을 연 최초의 한국인 화가였을 것이다. 대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진 사람들은 작품성과 별개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안영일은 작품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여 보석 같으니, 격랑의 한 시대를 짊어진 삶을 캔버스를 통해서만 표출해온 작가를 미술사에서 바른 위치에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늦었지만 80세가 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안 화백은 2017년 라크마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가졌고, 롱비치 뮤지엄에서 두차례의 대형 회고전이 열렸으며, LA 타임스가 크게 보도하면서 화가 인생의 정점을 맞았다. 그리고 잊혔던 몇십년의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하듯 지난 5년 동안 한국, LA, 시카고의 주류 갤러리에서 특별초대전이 잇달았다.

때마침 세계 화단에 불어 닥친 한국 단색화 열풍이 안영일의 ‘물’을 재평가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영일의 ‘물’은 미국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한인작가가 캘리포니아에서 독창적으로 구축해온 세계라는 점에서 한국의 단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훨씬 미국적이고, 캘리포니아 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이 녹아있는 작업이다. 캔버스에서 태동한 그림이 아니라 샌타모니카 바다 한복판, 생과 사의 교차점에서 맞이한 생명의 찬미가 녹아있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평가와 주목이 요구된다.

라크마 현대미술부 큐레이터 크리스틴 Y. 김은 안영일 작품을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빛에 경도된 대가들(제임스 터렐, 로버트 어윈, 샘 프랜시스, 리처드 디벤콘)과 함께 비교하면서 “남가주의 풍경과 해변, 미국 현대미술의 영향이 혼재된 작업”이라고 평했다.

라크마 한국미술부 큐레이터 버지니아 문은 “많은 디아스포라 한인작가들이 고국의 열망이 담긴 작업을 하지만 안영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관점과 회화들은 모두 대단히 캘리포니아 적이고, 대단히 로스앤젤레스 적이다”라고 썼다.

안영일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서평에서처럼 한국을 일찍 떠나와 오래 잊힌 그가 국내화단에서 제 위상을 찾기를 바랬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의 예술은 한국을 넘어 미국과 세계 화단에서 빛을 발할 유니버설리티, 그 진리의 본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죽어야 돼.” 선생님이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다. 작가가 죽은 후라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고단한 붓질을 쉬고 영면에 들어간 고인에게 현대미술계의 진실되고 합당한 평가가 내려지길 기대한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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