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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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시간여행 27 시계 이야기 #20 고장난 시계(2)

2020-12-20 (일)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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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날’ 오면 한잔 하자던 친구는

제프의 시간여행 27 시계 이야기 #20 고장난 시계(2)

‘곱슬머리’가 내 결혼식 날 차에 Shaving Cream으로 “용호야 잘 살아라”라 쓰고 있는 모습. 불과 몇 달 후 우리는 그의 아버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뒤편 흰 와이셔츠가 무역사업으로 대성한‘창완’. 작은 사진은 DC 경찰학교 졸업사진.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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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깨우는 혼들
아무리 비싼 시계도 고장 난 시계를 착용하고 다닐 수 없다. 고장 난 것은 수리하고 고쳐야한다. 시계란 목적(purpose)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 부조리를 고치고 살자며 몸부림쳤다가 그 풍랑에 나 또한 휩쓸리고 말았다.
울면서 세상에 태어나 울면서 가는 인생, 삶이란 태생적으로 비극이며 다르다면 정도 차이일 뿐이다. 인생이 고장 난 시계 같다면 어찌하겠는가? 인생이란 방랑의 여정에서 마주쳤던 가련한 신음과 처절했던 울음소리들… 그 가슴 저린 비극들의 사연들이 내 혼을 찾아 다가온다. 떠도는 영혼은 본 모습을 상실한 채 어둠의 그림자로 남아 성운을 방황하다 깊은 밤 때때로 서럽게 찾아와 나를 깨운다. 나는 그런 혼들을 안다. 비참했다. 참혹했다. 그 이야기를 하겠다.


# 진달래꽃(Azalea) 필 무렵 올렸던 결혼식
1984년은 내 인생에 큰 획을 긋는 해였다. 이른 봄 버지니아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보안관으로 왕성한 일을 하면서도 계속 NOVA 학생 신분을 유지했다.
그해 초여름 친지들의 축복 아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속도위반으로 10월에는 보배 같은 첫딸을 얻게 되었다. 원하던 직장, 인생을 같이할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보배 같은 새 생명의 탄생 모두 축복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했던 1984년. 탄탄대로 같던 내 인생 그러나 그해 일어났던 한 비극적 사건으로 인하여 모두 바뀌게 된다.

# 친구들의 장난과 우의
작은 교회에서 열렸던 내 결혼식에는 NOVA 친구들이 참석하여 깡패같이 제멋대로 행동하던 내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축하해주었다.
없는 돈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결혼식이었지만 동창인 ‘창완’이와 ‘곱슬머리’가 분위기를 띄웠고 나의 단 하나 베스트 맨이었던 ‘스티브’는 양복도 아닌 스포츠 재킷 하나 덜렁 입고 타이도 없이 신랑인 내 옆에 섰지만 내 마음은 든든했다. 부모님이 전쟁 중 물 한 그릇 떠 놓고 결혼했다는 소리를 수없이 했기에 이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백인 목사님이 주례한 예식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니 ‘곱슬머리’가 면도크림으로 우리가 타고 갈 신혼 차 문짝에 “용호야 잘 살아라”라 써 놓았다.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면도 크림 대신 페인트로 칠했더라면 더 잘 살 수 있었을까?
내가 당시 몰던 LTD는 탱크나 진배없는 헌 차였다. 그러나 새 신부를 안고 운전석에 올라탄 나는 호기 좋게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친지들은 모두 손을 흔들어 주었고 신혼여행 대신 10분 만에 도착한 신혼 아파트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다음날 출근을 준비했다.

# 각기 다른 3총사들의 사연
내 친구들인 ‘창완’ ‘곱슬머리’ ‘스티브’의 공통점이 있다면 NOVA학생들로 모두 DC에서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완’이네는 리커 스토어 ‘곱슬머리’와 ‘스티브’는 마켓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스티브’ 식구가 운영하는 가게는 그 악명 높은 ‘Potomac Garden’의 한 중앙에 있었고 마약, 강도, 살인사건이 매일 벌어지는 동네였다.
가끔 가게에 들르면 방탄유리 안에서 ‘Grateful Death’ 노래를 들으며 정신없이 일하곤 했는데 “야, 너 조심해” 하면 양 어깨를 위로 으쓱 세우며 “형, 우리 이거밖에 없어” 하며 안전에 전혀 신경 안 쓰는 모습이었다.

‘창완’이 식구의 리커 스토어는 노쓰 캐피톨(North Capitol)에 있었다. 그 동네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Potomac Garden’보다는 양반이었고 마켓에 비해 주 6일 영업에 시간이 짧고 매상 좋다고 자랑했다. 세 명 중 그나마 안전한 NW 동네에서 장사하던 ‘곱슬머리’ 가게는 좋아 보였다.
부모님 모두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에 페어팩스(Fairfax)에 있던 그의 아파트로 갔다. 녀석이 스팸을 구워 주는데 “넌 어느 대학으로 전입할 거니?” 하고 물으니 “야, 우리 집 돈 없어. 어디든 싼 주립대학 가야지…” 하며 벌겋게 구은 스팸을 바라보며 맥주를 삼켰다.

# 곱슬머리’의 급박했던 전화 한통
보안관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늦가을 날 ‘곱슬머리’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야, 우리 아버지 총 맞았어.” 정신없이 달려간 가게에는 노란 경찰 테이프가 쳐 있었고 바닥에 혈흔이 보였다. 법과 관할권이 다른 DC에서 내가 손쓸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곱슬머리’ 아버님은 계산대 안에 있던 몇 푼의 돈 때문에 강도의 총탄에 운명을 달리하셨다. 폴스 처치(Falls Church) 소재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그분의 마지막 길은 눈물 바다였다. 그러나 장남이었던 ‘곱슬머리’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분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학업도 접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남동생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 험악한 DC 경찰서로 옮긴 사연
암울한 장례식장을 나서는 검은 영구차 뒤로 이어선 조문객들의 차량들 그리고 저 멀리 언덕 위 하늘을 찌를 듯이 보이던 하얀 교회 첨탑이 내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했고 그 고귀한 모습이 너무 야속했다.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순간 버지니아에서 보안관으로 정의와 법을 수호 한답시고 총을 옆에 차고 일하지만 DC에서 매일 죽어 나가는 한인들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박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장례식에 참석해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가?

옆에 타고 있던 와이프에게 DC 경찰국으로 옮기겠다고 혼자 하듯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극구 반대했다. 왜 힘들고 위험한 DC로 가겠느냐고 야단쳤다. 그녀는 갓 출생한 딸을 생각하라며 나를 말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만추에 힘없이 날리는 낙엽들이 이 세상을 등지고 떨어지는 영혼 같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DC 경찰관 시험을 보고 붙어서 DC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하기 전 셰리프(Sheriff) 사무실에서 내 보안관 배지를 반납하는데 댄(Dan)과의 추억 그리고 그동안의 정들었던 직장 때문이었는지 눈에 이슬이 맺혔다. 듬직한 셰리프는 나와 악수를 하며 “Jeff, careful it’s war out there! (조심해 거기 전쟁이야)”하셨다. 집에 오니 갓난아이 딸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보험회사에 전화 걸어 10만 불짜리 생명보험에 가입했고 그 보험은 지금까지 있다.

# 캘리포니아 드림
성탄을 앞둔 어느 날 ‘곱슬머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게를 팔고 식구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새 출발 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좋은 날’ 오면 한잔 하자며 끊었고 우리들의 1984년 성탄절은 그렇게 끝났다.
그 후 만날 수 없었던 ‘곱슬머리’, 이제 ‘좋은 날’ 왔는가? 캘리포니아 꿈 이루었는가? 친구야 이제 그 아픔 조금 가셨는가?
인생에서 즐거운 일들은 대부분 예기 가능 했던 반면 불행한 일들은 한순간 찾아왔다. 비극을 막아 보자며 겁 없이 뛰어든 경찰 생활, 나는 그 수많은 비극들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격려의 이메일 보내 주시는 많은 독자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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