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베토벤 250주년에 듣는 ‘합창’

2020-12-15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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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라디오방송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요즘 베토벤의 음악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일, 12월16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250회 탄생일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지구촌 전역에서는 이 위대한 작곡가를 기리는 음악행사가 대단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사실 베토벤 250주년 행사는 벌써 2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시작됐다. LA 필하모닉과 OC의 퍼시픽 심포니를 위시한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 실내악단, 콘서트홀들은 너도나도 베토벤 전곡 연주와 녹음에 도전하며 그의 음악적 유산을 기려왔다.

9개의 교향곡, 5개의 피아노협주곡, 32개 피아노 소나타, 33개 디아벨리 변주곡, 17개의 현악사중주…


올해 피크를 이룰 것으로 기대됐던 이 전곡연주 행사들은 그러나 팬데믹 때문에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베토벤의 탄생지 본과 그가 활동했던 빈에서는 2019년 12월17일부터 내일까지 365일 베토벤 마라톤 행사가 기획됐지만 지금은 대부분 취소됐거나 온라인과 스트리밍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코로나 대유행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베토벤의 생일은 거의 잊혀진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보름 후 우리는 다시 베토벤의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해를 보내는 의식으로 세계 곳곳에서 연주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 곡이 송년음악회의 단골 연주곡이 되었고, 특히 아시아권 그중에서도 일본국민들의 ‘합창’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매년 12월이면 전국의 대도시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합창’이 연주되지 않는 곳이 없다. 대형 실내체육관에 무려 1,000명에서 1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이 동원되는 이벤트성 공연까지 개최된다.

한국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송년음악회나 12월 마지막 정기연주회 무대에서 9번 교향곡의 전곡 혹은 4악장을 공연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베토벤의 고향 독일 본이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이러한 관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독일인들은 이 음악에 다소 민감한 편인데, 20세기 들어 ‘합창’ 교향곡이 정치적으로 이용돼온 까닭이다.

베토벤은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작곡가였고, 9번 교향곡은 히틀러와 나치들이 가장 즐겨 연주했던 곡이었다. 특히 전설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 레퍼토리에 이 곡을 빼놓지 않았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1937년과 1942년의 히틀러 생일, 히틀러친위대를 위한 각종 연주에서 ‘환희의 송가’가 자주 울려 퍼졌다.

반대의 목적으로 이 곡을 노래한 사람들도 있다.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지휘자 발터 담로쉬는 ‘유럽의 전쟁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1938년 뉴욕에서 ‘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다. 1944년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람들이 합창단을 조직하여 이 곡을 합창했는데 이는 나치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 노래는 찬송가 ‘기뻐하며 경배하세’(64장)에도 사용되어 결혼식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교향곡 9번은 베토벤이 오랜 슬럼프를 거쳐 12년만인 1824년 발표한 교향곡이다. 교향곡에 최초로 성악과 합창을 도입한 이 작품은 그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지은 곡이며 연주시간이 1시간을 넘는, 당시로서는 사상 초유의 대작이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도 멜로디를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지만 초연 당시에는 성악과 기악 모두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연주 불가능한 곡’, ‘졸작’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현재 서양음악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자필악보는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4악장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의 가사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붙임’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사가 상당히 긴데 그중 핵심이 되는 몇 소절은 이렇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백만인이여, 서로 껴안아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리라!”

클라이맥스에 이른 합창을 듣고 있으면 인류 공동체와 인생의 숭고함, 신앙의 환희를 노래하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빛처럼 쏟아져 내린다.

‘모두 형제가 되는 백만인’을 나치는 아리안 독일민족만으로 한정함으로써 시와 음악의 보편성을 훼손했지만 ‘환희의 송가’는 그 누구도 어떤 목적으로도 이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선각자 베토벤이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며 들려주는 ‘운명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찬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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