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된 해가 1961년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이른바 민정이양 형식으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1963년 10월 15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선거다.
당시 여권은 박정희 공화당 후보로 단일화 돼 있었다. 야권은 사분오열 상태에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정당,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끌던 신정당, 이범석 전 총리가 이끌던 민우당, 박순천 전 의원이 이끌던 민주당,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끌던 자유민주당 등으로.
거기다가 장택상이 이끄는 자유당이니 변영태를 후보로 내세운 정민회니, 송요찬의 자민당이니 하는 군소정당까지 합치면 사분오열이 아니라 ‘팔분구열’(?)의 상태였다고 할까.
결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는 7명이나 됐다. 그러니까 여권의 박정희 공화당 후보에 대항해 윤보선, 허정, 변영태, 송요찬 등 야권에서는 6명의 후보가 난립해 싸우는 형국이 된 것.
이 상황에서 유행을 탄 말이 ‘황야의 7인’이다. 때마침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극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히트를 치자 이를 빗대 풍자한 것이다.
야권의 후보단일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허정 후보는 10월 3일에, 송요찬 후보는 10월 12일에 등 대선 막바지에 후보를 사퇴해 너무 늦었다고 할까.
개표 결과 1위 득표자인 박정희 후보가 2위인 윤보선 후보 보다 15만6,026표를 더 얻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됐다.
훗날 밝혀진 당시의 비화가 ‘편지보내기 작전’이다. 야권후보가 많이 나올수록 여권이 유리하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야권의 후보단일화를 막아야 한다.
그래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비밀리에 전개한 작전이 편지보내기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뭐랄까. 한국판 댓글부대 동원의 효시라고 할까.
대권 야망이 있는 야권의 잠룡들에게 전국방방곡곡에서 날라들었다. 요컨대 애국자이시고 위대한 지도자이신 선생님의 대선출마는 국민의 여망이니 이를 결코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의. 그 편지들 받아든 잠룡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야 말로…’가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험블’하게 시작된 한국의 댓글부대의 위세는 날로커져 집권여당 지도부조차 두려워하는 존재가 됐다.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던가. 그 댓글부대제국의 해가 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달아서다.
적으로 좌표를 찍는다. 그러면 문자테러를 통해 일제히 마녀사냥에 나선다. 우리 편이면 무조건 옹호하는 거다. ‘우리가 아무개다’식의 격려 해시태그운동과 함께. 그 공격에 쓰러진 사람이 부지기수다. 반면 그 해시태그운동에 힘입어 우쭐대는 인물도 하나 둘이 아니다.
그동안 그들이 보여준 가공한 위력 때문에 여당의 지도부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그 문빠가 그런데 알고 보니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여론조작 세력이라는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먼저 문빠의 허상을 지적하고 나선 사람은 여당인 민주당의 5선 이상민의원이다.
기껏해야 2-3000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적으로 이들이 떼를 지어 바른 말하는 의원들에게 문자폭탄을 던지고 당원 게시판을 도배하며 집권당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
무엇을 말하나. 여권 인사가 ‘문빠의 실체를 폭로하고 나선 이 해프닝은. 문재인 정권의 거듭된 실정이 부각되면서 내부의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한 면 연성독재 특유의 공포조장식의 통치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반증이 아닐까. ‘너도 내 말 안 듣고 저랬다가는 쟤처럼 우리한테 당한다’- 문빠란 존재가 심어온 공포감이다.
그 문빠가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공격대상이 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