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크렘린 궁 벽에는 ‘무명 용사의 무덤’ 기념비가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터진 ‘대 애국 전쟁’에 참전했다 목숨을 바쳤지만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은 장병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구조물로 그 앞에는 ‘영원한 불꽃’이 불타고 있고 매시간 의장대가 행진을 한다.
이 전쟁에서 죽은 소련인 수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2차 대전 중 희생된 미군과 민간인 수가 40만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나치와 싸운 소련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은 이름도 없이 어딘가에 묻혀 있지만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나치는 아직도 유럽을 지배하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미국에도 버지니아 알링턴 국립 묘지에 ‘무명 용사의 무덤’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에는 평화와 승리, 용기를 상징하는 그리스 인 형상이 조각돼 있고 그 뒤에는 “신만이 아는 미국 용사가 여기 존경스런 영광 속에 쉬고 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역사 책에는 유명한 장군과 지도자 이름만 기록되지만 나라를 구하는 것은 결국 수많은 이런 사람들의 용기다. 아무리 유능한 장군도 혼자 적을 상대할 수는 없고 전쟁터에서 실제로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은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무명 용사들이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부정 선거를 외치며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외치고는 있으나 트럼프의 선거 불복 소동은 사실상 패배로 끝났다. 미국 정치 체제의 근간인 민주주의를 뒤흔들려는 트럼프의 기도를 막아낸 것은 유명 정치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선거 관리인과 판사들이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지난 주 보도했다. 이중 상당수가 공화당원이고 일부는 트럼프가 지명한 판사들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 중의 한 명이 미시건 주의 소도시 로체스터 힐의 선거 담당 공무원 티나 바튼이다. 열성 공화당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녀는 부정 선거를 이유로 개표 결과를 무효화하라는 트럼프 캠페인과 지지자들의 협박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선거 부정은 없었다는 사실을 떳떳이 밝혔다.
미시건에서 법원과 공무원들이 말을 듣지 않자 트럼프는 미시건 주 상원 다수당 원내 총무인 공화당의 마이크 셔키와 하원의장 리 채트필드를 백악관으로 불러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대의원을 선거인단으로 인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유권자의 뜻을 뒤집을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애리조나에서 트럼프 측은 샤피 펜의 잉크가 번져 투표가 무효로 처리됐다는 주장을 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화당원인 마크 브르노비치 주 검찰총장은 조사해 본 결과 샤피 펜은 선거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조지아도 마찬가지다. 2년 전 트럼프 지지로 당선된 브래드 라펜스퍼거는 보수파 공화당원이다. 그런 그가 트럼프 측의 압력을 거부하고 선거는 공정했다며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 인정했다. 부정 선거를 이유로 결과를 무효화 해달라면서 트럼프 측이 연방 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트럼프가 지명한 판사에 의해 기각됐다.
펜실베니아 선거 결과 확정 발표를 연기해 달라며 트럼프가 연방 지법에 제기한 소송도 보수파 공화당원 판사에 의해 기각됐다. 트럼프 측은 이를 즉시 항소했으나 항소 법원에서 또 기각됐다. 2017년 트럼프가 지명한 필라델피아 항소 법원의 스테파노스 비바스 판사는 트럼프 측의 소송을 기각하면서 “선거를 무효화 하려면 구체적인 주장과 증거가 있어야 한다”며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트럼프 주장이 줄줄이 법원에서 기각되는 이유는 근거가 없어도 아무 주장이나 퍼뜨릴 수 있는 인터넷 공간과는 달리 법정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뚜렷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측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규모 부정 선거의 증거를 한번도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가 속한 공화당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대통령의 요구를 기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곧 잊히겠지만 미국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의 용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 정도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회 곳곳에 이런 사람들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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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