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가을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서양 한 가운데 배 한 척이 외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다. 승객 중 하나였던 존 하우랜드는 배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갑판으로 올라왔으나 빗물로 미끄럽고 파도가 쉴새없이 덮치는 갑판에서 순식간에 밀려나 대서양 한 복판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갑판 밖으로 내려진 밧줄을 붙잡았고 선원들은 밧줄을 끌어당겨 그의 생명을 구해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독실한 신자였던 하우랜드가 살아나는 것을 본 선원과 승객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할 수 없었다. 이 배가 바로 ‘순례자 아버지’(Pilgrim Fathers)를 싣고 지금 매서추세츠 플리머스에 닻을 내린 메이플라워 호였다.
17세기 초 영국에는 영국 국교 성공회에 반기를 든 종교 집단이 존재했다. 양심의 자유를 존중한 이들은 스스로를 ‘분리주의자’(Separatists)로 불렀고 영국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자 네덜란드 라이든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2세들이 점점 더 네덜란드의 세속적 문화에 물드는 것을 지켜본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1620년 라이든에서 영국을 거쳐 11월 9일 지금의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 자발적으로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식민지의 공동선을 위해 정의롭고 공정한 법을 제정할 것을 결의한다. 이것이 ‘미 역사상 최초의 성문 헌법’으로 불리는 ‘메이플라워 규약’(Mayflower Compact)이다.
두 달이 넘는 고된 항해 끝에 신대륙에 발을 내디디기는 했으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무지와 추운 겨울이었다. 그들은 몰랐겠지만 그 때 그곳에 도착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곳은 불과 수 년전까지 수천 명의 원주민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구를 잡으러 온 영국 어선의 선원들이 원주민과 접촉하면서 구대륙 질병에 면역이 없던 원주민 90%가 사망했고 그 바람에 그곳이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살아있었더라면 메이플라워의 필그림들은 내리자마자 몰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그림들은 원주민 부락에서 이들이 남기고 간 옥수수를 찾아 냈지만 그럼에도 102명의 이주자 중 절반이 질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 다음해 봄이 왔지만 이들이 영국에서 가져온 보리와 밀 농사는 신대륙의 토양에 맞지 않아 실패했으며 모두 아사 직전에 놓였다.
이 때 이들을 구해준 것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원주민 스콴토였다. 영국 선원들에 납치돼 스페인으로 끌려갔다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운 그는 다시 신대륙으로 돌아와 메이플라워 필그림들과 만난 후 물고기를 잡아 비료로 만들고 신대륙 토양에 잘 자라는 옥수수 심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그 해 가을 모두가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추수가 가능해졌고 이 때 원주민과 필그림이 함께 만찬을 즐긴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는 게 정설이다.
신대륙에 도착한 필그림들은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수확량을 늘리는 방안 마련에 힘썼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후 원주민 마을에서 가져간 옥수수에 대한 배상을 인디언들이 요구하자 칼과 장신구를 지급함으로써 해결했다. 또 이곳 주요 부족의 하나인 포카노켓 족의 추장 마사소잇이 병으로 죽기 일보직전에 이르자 서양 의학으로 살려냄으로써 그를 친구로 만들었다.
종교적 공동체였던 이들은 처음에는 경작도 공동으로 하고 분배도 똑같이 했다. 소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마르크스보다 200년 먼저 이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장하고 힘있는 청년과 힘없는 노약자가 똑같이 분배받는 체제에서는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수확은 형편없었다.
1623년부터 농토를 개인에게 나눠주고 각자가 수확한 것은 각자의 소유로 하자 노인네와 아낙, 어린 아이들까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추수가 가능해졌다. “미국은 사회주의의 무덤”이란 말은 이때부터 나왔다 봐도 된다.
대서양에서 물고기 밥이 될뻔 했던 하우랜드는 훗날 10명의 자녀를 뒀고 이들은 다시 88명의 손주를 낳아 뉴잉글랜드 최다 가문의 하나가 됐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란 성경 말씀은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순례자들’의 꿈은 현실과의 큰 거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의 정신적 좌표로 남아 있다. 메이플라워 도착 400주년을 맞아 그들의 고단했던 여정을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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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