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떨 땐 그냥 죽고 싶어요.”
▶ 헤어져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1979년 텍사스 달라스의 커튼 볼에서 당대 최고의 락 밴드 공연을 보며 찍은 사진. 작년 바로 이 자리에서 한국의‘방탄 소년단 BTS’가 공연을 했다니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왼쪽) 군에서 차고 다니던 Casio,‘MADE IN KOREA’가 선명하다. 7080 시대에는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국산 물건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고 미국상점에서 한국 물건이 보이면 무조건 구입했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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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각과 유부녀의 사랑
며칠 후, 나의 질문에 ‘긴 머리 김’이 실토했다. 그녀는 유부녀, 그리고 미국생활에서의 외로움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자기가 좀 즐겁게 해주는 그런 관계라고 무용담처럼 말했다.
남의 애정 문제에 관여할 바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그녀를 동정 하는 듯한, 그리고 불륜을 자랑스레 말하는 그의 말투가 싫었다. 남진 공연 후에도 ‘긴 머리 김’과 그의 여친을 몇 번 더 만났지만 자리가 어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민간 사무실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 걸레 자루(Mop)를 든 여자
긴 사무실의 시멘트 바닥을 걸레로 닦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래서 고개를 돌렸다. 청소 업(Janitorial)하는 것이 흉이 아니지만 젊은 그녀는 창피했던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온 나를 그녀가 따라와서 커피 한잔 사달라고 했다.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앉은 그녀가 “왜 요즘 말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진실을 말하기 뭣 하여 워싱턴에 두고 온 여동생이 걱정돼서 그렇다고 둘러 됐다. 그녀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한국에 두고 온 동생들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청소해서 번 돈을 한국의 친정식구에게 보내주는 사연을 말했다.
내가 “남편은 안 도와주느냐?”고 묻자 잠시 주저하다 검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절대 그럴 일 없죠. 돈 관리는 다 아저씨가 해요.” 하며 빡빡한 미국 월급쟁이 생활을 한탄했다. 그리고 어깨가 아프도록 빡센 미국 직장 일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체구가 왜소한 한인들에게 그 큰 걸레 자루와 무지막지하리만큼 거대한 걸레 물통들은 버거운 존재였다. 그녀는 그렇게 모은 돈을 한국 식구들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조 섞인 투로 말했다. “어떨 땐 그냥 죽고 싶어요.” 헤어져 일터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내 개인적 정의(morals) 잣대를 그녀에게 들이댔던 내 모습 역시 초라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80년 그 버려진 듯한 황무지 속의 마을을 떠난 후 그 교회, 그 식당, 그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
#와이프와 다시 찾은 텍사스
작년 여름, 국방부에서 텍사스에 소재한 군 기지(San Antonio)에 민간 계약을 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사이즈가 제법 되는 계약(contract)이라서 와이프와 둘이서 여행 겸 같이 떠났다. 40년 만에 다시 찾은 텍사스 중남부는 여전히 덥고 넓은 곳이었다.
첫날 다운타운 강가 호텔에 짐을 풀고 여유롭게 미국의 성지와도 같은 알라모(Alamo)을 둘러보고 정겨운 테제노(Tejano) 음악을 Tex-Mex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 젊은 시절 텍사스 주립대학(Austin)까지 달려가 보았던 Linda Ronstadt 공연, 댈러스 Cotton Ball에서 보았던 Cheap Trick 공연들이 떠올랐다.
막힐 것 없는 삶만 같았던 젊었던 시절의 추억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멕시칸 기타 음줄에 살아났다.
# 사라진 ‘금강산’ 식당과 ‘긴 머리 김’
다음날 진행된 정부관계자들과의 미팅은 회의를 위한 회의를 하는 기분이었다. 순간 미 정부나 기업들은 왜 이렇게도 미팅들을 많이 할까? 이렇게 더디게 일 처리를 하다 보면 다른 나라들에게 뒤쳐질 것 같다는 우려의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미팅 룸에 않아서 정부 관계자들의 끝없는 탁상공론을 듣고 있자니 회의실 밖 복도를 청소하는 젊은 스페니쉬 청소부 여성이 통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흥겨운 자신들의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흔들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때 그 청소부로 일하던 ‘긴 머리 김’의 여친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한국여성이, 지금은 스페니쉬 여성이 같은 목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 주위에 있는 수많은 송금 업소들(Western Union)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들이 엘살바도르 등 고국의 가족들에게 땀 흘려 얻은 수입을 송금해주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그 작은 마을(킬린)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샌 안토니오(San Antonio)에서 4시간 정도 거리를 달려 찾아간 그 마을은 중소도시로 탈바꿈해서 완전 딴 세상이었다. 내가 젊은 시절 군 복무하며 거의 매일 찾았던 ‘금강산’ 식당도, 그 주인 아들도, 그 ‘긴 머리 김’도 텍사스 바람에 날아간 회전 초(tumbleweed) 마냥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가슴 아프게’ 들으며 흘렸던 눈물들
다른 어느 예술과 달리 음악은 춤추는 무희의 동작과 같이 공중에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연약한(fragile)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보에서만 숨 쉬는 음악이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 순간성에 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들으며 같이 울며 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던 우리들은 순수했다. 그때는 처음 본 아낙들이 이역만리 먼 곳에 와서 군인으로 고생한다며 먹을 것을 싸주었다. 그러면 군 막사로 돌아와 저녁 늦은 시간 음식 냄새 걱정하며 혼자 조용히 먹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민자이기에 온갖 궂은일들을 하면서도 한 푼 두 푼 모아서 한국으로 송금하던 때였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감동으로 가슴에 남는다. 순간과 순간이 교차되고 연결되는 것이 삶이라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음악을 만들어 내며 살고 있는 것일까?
# 좌절 없는 삶, 그 삶을 있게 한 여성분들
수많은 사람들이 힘든 미국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팝송이든 트로트든, 아니면 그냥 뽕짝이든 우리는 가슴에 와닿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고 외로움도 삼키며 열심히 살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좌절 없이 앞만 보며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땅에 우리 뿌리를 내리는데 큰 일조를 했다.
그 역할의 중심에 있었던 모든 여성분들에게 지금 그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시어즈에서 매입했던 첫 국산 카시오 시계는 배터리만 갈아주면 지금도 잘 달린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
Jeff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