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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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시간여행 16. 시계 이야기 #10: 해시계 (하)

2020-11-09 (월)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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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나, 우리 아빠 따라서 미국 가요!”

제프의 시간여행 16. 시계 이야기 #10: 해시계 (하)
제프의 시간여행 16. 시계 이야기 #10: 해시계 (하)

심플하며 변함없는 뒷마당 해시계에“Grow old along with me the best is yet to be(최고는 아직 안 왔어. 나와 같이 나이 먹어가자)”라 새겨져 있다. 늦가을 햇살 아래 와이프가 브루(brew) 해준 따뜻한 커피 향과 같이 은은한‘Cavatina’ 기타 연주를 듣고 있으니 그 말에 담긴 철학이 가슴 저리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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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상사의 도움
육군 상사가 일사천리로 서류를 만들어서 병과 교육을 마치는 대로 한국 배치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마치 구세주 같아 보였다.
그가 만들어준 새 서류와 군 증명서에는 내 이름 스펠링과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내 학생증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그는 내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 근무 또는 월남전에서 한국군과 생사를 나누었거나 아니면 와이프가 한국 분이거나 분명 무엇인가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 상사가 나를 기차역(Union Station)까지 데려다주며 훈련소(Ft, Dix New Jersey)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어 주었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인가를 많이 했지만 들뜬 마음에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훈련소에 가는데 개인 소지품이 있느냐는 질문만 겨우 알아들었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칫솔만 보여주었다. 손에 쥔 거라고는 입소증 하나. 수중에는 돈도 없고, 군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밤 열차
난생 처음 타보는 미국에서의 밤 열차. 그 상사의 손짓에 따라 플랫폼 앞으로 나아갔다. 열차 칸에 몸을 실은 후에야 학교에 아무 통보 없이 군에 입대한 것을 깨달았고 없어진 아들 걱정을 하실 아버지 그리고 남겨둔 여동생이 너무 걱정 됐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낯 설은 밤 풍경은 두려움으로 엄습해왔다. 그 밤 열차 여행은 마치 ‘해리 포터’의 밤 열차 여행마냥 미지의 세계와 어두운 현실을 공존하는 듯 순식간에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는데도 기차에서 내려 걷고 걸어서 훈련소 정문에 새벽이 다 되어 도착했다. 그날 그 새벽 햇빛으로 인해 비로소 나의 해시계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 왔음을 알렸다.

#첫 봉급
군 생활의 시작은 악전고투였다. 훈련소에서 미군은 모든 개인 용품들을 스스로 사서 써야했다. 아무런 준비를 안 한 탓에 남들이 샤워를 마친 후에 샤워장에 들어가 쓰다 남은 비누를 사용했다. 동료들이 PX에서 게임용품을 살 때 수중에 돈이 없었기에 모른 척 딴 짓을 했다. 혹독한 첫 한 달의 훈련이 지나고 나서야 첫 월급을 받았다. 그린 색에 구멍이 솔솔 난 연방정부 수표를 처음 받았던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에 다니며 7-11에서 아르바이트 했지만 한 번도 내가 받아쓰지 못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당장 PX로 달려가서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저녁 불빛 흐린 막사 전등 아래에서 아버지에게 편지 한통을 썼다. 그리고 그 첫 월급을 동봉하여 부쳐 드렸다.

#미군으로의 재탄생
영어가 서툰 것뿐만 아니라 군사용어를 배워나가는 도중에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명령을 알아듣고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옆 동료들을 보며 눈치로 따라 하다 보니 참으로 힘들었다. ‘앞으로 가’와 ‘뒤로 가’ 하는 기본적인 것을 배우는 데만 여러 번 기합을 받았다.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빗물이 쏟아진 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땅은 굳어지는 법이다. 힘든 훈련 후 동료들이 피곤하게 잠든 시간 나는 막사 천장을 바라보며 입속으로 구호들을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 외운 군가들을 부를 수 있다.

영어를 배우는 데는 왕도가 없다. 미국인들과 부딪치고 생활화해야 한다. 그리고 온갖 지방에서 온 청년들과 섞여 살다 보니 미국 문화와 영어를 빨리 배우고 미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싹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훈련소를 마칠 때쯤 자니 카슨의 ‘The Tonight Show’을 보며 동료들과 같이 웃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만난 윤 씨 아저씨
훈련소 졸업식에는 많은 미국 부모들이 참석했지만 우리 식구는 없었다. 힘겨운 기본 훈련을 마치고 ‘병과 학교’로 가기 전 하루 휴가를 내서 집에 들렀다. 불과 몇 달만의 떨어짐이었는데 우리들은 너무나 먼 길을 지나온 것 같은 심정이 들었다.
그날 저녁 한국으로 배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윤 씨 아저씨가 달려왔다. 그분이 내게 조용히 돈 봉투를 건네며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손끝에 절실함이 묻어 나왔다. 불과 몇 달 사이지만 그분은 여전히 불체자이기에 자유스럽지 않았고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에서 미군으로 변신하여 한국 근무를 나가는 군인으로 돌변해 있었다.

고국에 도착해서 만난 그 분의 부인은 참한 가정주부였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당돌 차게 내게 말했다. “아저씨, 나, 우리 아빠 따라서 미국 가요!” 돈 봉투를 건네고 뒤돌아 내려오는 비탈길이 어수선했다.
그 당시 젊었던 그 부인과 그 똘똘한 아드님은 미국에 올 수 있었을까? 그 이후 아무런 소식을 모른다. 수십 년이 지나 애난데일(Annandale)에 윤 씨 아저씨가 어느 분과 큰 식당을 차리셨다. 분주한 식당에서 그분과 마주쳤다.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왜인지 그분이 나를 피하셨다. 가슴이 ‘찡’했다.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난 삶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에 자원입대 하는 젊은이들의 사유는 제 각각 다양할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 대한 충성 보다 나와 같이 개인 사유가 우선일 것이다.
지원자들은 직장이 필요해서 또는 여러 혜택(Benefit) 때문에 입대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일단 입대한 후부터는 모두가 새로운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영국군의 ‘구르카’ 부대나, 프랑스의 ‘외인부대’와는 질이 다르다. 미국 생활에는 온갖 사연과 시련들이 존재한다. 하늘아래 해시계와 같이 변함없는 진실은 열심히 사는 자에게 축복의 햇살이 내린다는 사실이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만났던 그 분들과의 짧지만 나에게 너무 소중했던 순간들. 그분들은 이제 연세가 많이 드셔서 이 세상에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르겠다. 윤 씨 아저씨, 해병대 하사관, 그리고 그 순간에 있어 주셨던 육군 상사분. 내 어린 나이에 찾아온 고마운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음 이야기는 미군에서 겪었던 특이한 사연들을 말하겠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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