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두고 가는 가을

2020-10-31 (토)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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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프레 밖이 보인다. 이탈리아인 노부부가 사는 집은 오래된 콜로니얼식 집으로 넓은 앞마당은 영화에서 본 듯한 그림처럼 늘 간결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그 마당 한가운데에는 그 노부부보다 오랫동안 비와 바람을 맞으며 그 집을 지켜온 하얀 자작나무가 서 있었다. 겨울에는 눈보다 희였고, 여름밤에는 쏟아지는 별보다 밝게 빛났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허리를 끊어내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아침이 오면 그 소리마저 온 몸으로 품은 듯 나무는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 끝나갈 무렵 몰아친 열대성 폭풍은 그 큰 나무의 밑둥을 무참히 꺾어놓았다. 골목길이 텅 빈 느낌은 허전함을 넘어선 것이었다. 문득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해야 했던 첫 기일이 생각났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무 가지에 위태롭게 늘어져 있던 전깃줄이 복구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웃집들의 잔가지들은 모두 치워졌으나 노인의 앞마당에 쓰러진 큰 자작나무는 2주일 넘게 그 자리에서 시들어갔다. 날마다 정원을 손질하던 노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쓰러진 나무와 노부부의 얘기를 화제에 올리며 걱정을 하곤 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했으나 새들은 유유히 강을 건너갔다. 뒤를 따라 단풍도 강을 건넜다. 강의 이 쪽과 저 쪽은 이미 경계를 잃어 버려서 강을 끼고 도는 작은 마을은 온통 가을에 점령당해 있는 듯 보였다. 그 가을빛이 천천히, 그러나 짙게 노인의 앞뜰에도 내려오는 날이었다. 쓰러졌던 큰 자작나무가 조심스럽게 치워졌다. 그리고 그날, 하얀 속살을 드러낸 나무 밑둥 위에는 하얀 국화꽃을 가득 채운 화분이 놓여졌다. 다시 앞뜰을 가꾸는 노인이 보였고, 멀리서 봐도 노인의 키가 한 뼘은 작아 보였다. 노인의 굽은 등에도 가을이 깊게 드리워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비가 왔다. 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나무들은 눈에 띄게 색이 짙어져 갔다. 멀리 물러나 있던 숲들이 성큼 다가왔고 몸속으로 파고드는 찬 새벽 공기를 느끼며 옷깃을 몇 번씩 여며야 했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가을인데도 마음은 아직도 여름 끝자락을 매만지며 준비없이 아침을 맞고 있었나 보다. 오래된 벤치 아래에 이름도 없이 피었다가 지는 들꽃을 볼 때마다 허망하다는 생각에 그 구석진 자리에 눈길이 멈추었다. 들꽃이 피던 낡은 벤치 아래에는 들꽃 대신 바람이 집을 지었다. 성긴 바람의 집 사이로 선하디 선한 얼굴들이 보였고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을 외할머니와 할머니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되었던 할머니의 오래된 집과 그 집만큼이나 오랫동안 그 집에 전해 내려왔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소나기가 시작되는 여름밤에서 시작되어 별 조차 얼어버리는 겨울밤까지 이어졌다.

그 숱한 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특히 견우와 직녀와 대한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9살 어린 소년을 설레게 했었다. 은하수 동쪽에 사는 견우와 서쪽에 사는 직녀가 일년에 한 번 씩 만나는 날을 칠월 칠석이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먼 거리에서 서로 바라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다만 애틋한 사랑이 비가 되어 칠석날 밤에는 만남을 기뻐하는 비가 내리고, 다음날 새벽에 내리는 비는 이별을 슬퍼하는 비가 내린다는 말에 막연히 칠석날에는 비가 올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야 사실은 지구 자전에 의해 두 별이 만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두 별이 제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먼 거리에서 서로 바라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목이 메이는 것일까를 짐작하기에 소년은 너무 어렸었다. 머나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지내는 사실이 슬픈 것인지, 만남후의 이별이 슬픈 것인지 나는 물었지만 할머니는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슬픈 것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없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는 늘 이 가을에 소환되곤 했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었다.

새를 보려고 떠난 길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멀리 사라지는 기차를 눈으로 따라가며 떠나지 못한 가을 여행을 그리워한다. 이따금 날개를 접은 하얀 새가 종이비행기처럼 머리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인적이 드문 숲길을 나서니 호수가 보였다. 호수를 따라 걷다보니 바람이 나를 따라 나서며 말을 건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의 실체가 특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일거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여전히 가끔은 상실감과 안도감이라는 상반된 감정에 혼란스럽다. 그러나 떠나가는 것과 남겨진 것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도 나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하늘은 맑고 투명한 날이다. 이 가을에는 빈숲의 끝자락에 오래된 기억 하나를 묻어 두고 가려한다.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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