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리두기’의 계절

2020-10-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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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거리두기’의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 속에 정착된 지는 오래다. 실내에서의 일정거리 유지는 기본이고 비교적 안전하다는 야외에서도 최대한 거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팬데믹이 시작된 지난 봄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화된 데 이어 가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정치적인 거리두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1월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와의 관계가 정치적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놓고 고민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와 가까운 관계로 비쳐질 경우 선거에 불리하겠다 싶으면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트럼프와의 기존 관계를 부정하면서 거리를 두는 정치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번 달 초 열린 첫 대통령 토론회를 트럼프가 엉망진창으로 만든 후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토론회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연방 상원 선거에 나선 공화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3~4%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적인 트럼프 효과에 공화당 의원들이 긴장하면서 거리두기에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리두기에 적극적인 대표적 인물은 애리조나의 마사 맥샐리 연방 상원의원이다. 맥샐리는 평소 트럼프 아첨꾼으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이다. 그랬던 그녀가 최근 애리조나 연방 상원의원 후보토론회에서 “아직도 트럼프를 지지했던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라는 상대 질문에 핵심은 회피한 채 “나는 애리조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엉뚱한 답변만 늘어놓았다.

맥샐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리조나는 무당파 유권자가 무려 32%에 달하는 대표적인 ‘퍼플 스테이트’(경합주)이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무당파 유권자들의 트럼프 지지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맥샐리는 현재 상대 후보에 10% 이상 뒤지고 있다.

공화당이 현역인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 주의 현역 상원의원인 존 코닌은 트럼프가 코로나 팬데믹에 무질서하게 대응함으로써 혼란을 야기 시켰다고 비판했다. 판세가 박빙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 따른 전략적 거리두기이다.

2016년 트럼프가 거의 10%포인트 차로 이겼던 아이오와에서도 그렇고 콜로라도에서도 공화당 현역이 상대에게 끌려가고 있는 판세이다. 자칫 트럼프와 연방 상원이 함께 몰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는 상태이다.

공화당 의원들의 거리두기는 정치광고에서도 확인된다. 한 선거광고 전문회사에 따르면 전국의 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내보낸 선거광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된 것은 4%도 되지 않았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는 트럼프를 많이 언급하다 일단 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이를 기피한다. 당내 경선에서는 여전히 건재한 트럼프지지 세력의 눈치를 보지만 일단 본선에 진출하면 무당파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해 트럼프와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선거 캠페인을 놓고 후보들의 혼란이 커지자 공화당의 전설적인 선거 전략가인 에드 롤린스는 아예 모범 답안을 만들어 후보들에게 건네주고 있다. 트럼프와 관련된 질문을 받을 경우 “그에 대한 지지가 우리 주 이익과 부합할 때는 그렇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 주의 주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게 나의 업무”라고 대답하라는 것이다.

공화당 내의 이 같은 분위기는 갈수록 커지는 불안과 절박함을 보여준다. 공화당이 대통령과 연방 상원을 한꺼번에 내준 것은 지난 1974년 워터게이트 여파로 그렇게 당한 후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정치인들은 후각이 극도로 잘 발달돼 있는 부류들이다. 점차 더 많은 연방의회 후보들이 트럼프와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공화당으로선 그리 좋은 징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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