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누가 다스려야 하나? 인류역사 속 무수한 나라가 리더에 따라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인류사는 이어져오고 이어져간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만물에는 모두 고유의 텔로스가 있듯이 국가의 텔로스는 선과 정의이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학식 있는 현자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맹자는 지식에 의한 지배가 아닌 덕의 지배를 요구했다.
덕을 갖춘 군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를 민심의 바다에 떠있는 배에 비유하며 물을 거스르면 배는 뒤집힌다고 믿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주 옆에는 리더가 견지해야할 품성을 키우기 위한 인문학 교육을 담당한 스승들이 있었다.
역사에서 제일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었고 그로부터 철학, 문학, 사회, 역사 등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학문과 덕을 배웠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자백가’ 사상가를 곁에 두고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린 군주들이 많았다.
이것이 제도화되어 철학과 역사 제반 인문학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을 ‘경연(經筵)’이라 했다.
중국에서 비롯된 경연제도는 한과 당대를 거치며 어전 강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청나라의 4대 강희황제 때 꽃을 피우며 뛰어난 치적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군주의 인격을 수양하는 차원에서 경연이 시행되었다.
성군 세종대왕은 33년의 재임기간동안 매일 경연에 참여하여 집현전 학자와 더불어 학문을 토론했다.
경연을 멀리했던 왕은 광해군이었다.
재임기간 15년에 고작 13회만 열렸다고 한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30여일 앞두고 공화 민주 양당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전 부통령의 첫번째 TV 토론이 9월29일 있었다.
90여분간 계속된 토론을 보며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두 후보의 언행의 무례함, 천박함에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미국에도 한때는 대통령들이 책사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을 옆에 가까이 두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백악관에는 국가의 텔로스를 일깨워줄 스승도 재상도 없고, 지도자의 품격을 지키며 국가를 이끌어갈 방향을 설정하는 경연도 없는 모양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홀연히 나타나서 국가 정의를 실현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인가 보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훌륭한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주권자인 공공의 시민성을 갖춘 시민들이라는 것이다.
한 국가의 품격은 그 국가의 구성원의 공공성과 사유의 깊이에 비례한다.
19세기 알렉시스 토그빌의 “모든 시민은 그 시민의 수준에 맞는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오늘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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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남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