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제프의 시간여행 8. 시계 이야기 *6- Seiko

2020-10-18 (일) Jeff Ahn
크게 작게

▶ 발랄한, 그래서 즐거운 추억의 여인

제프의 시간여행 8. 시계 이야기 *6- Seiko
제프의 시간여행 8. 시계 이야기 *6- Seiko

어머니가 차셨던 세이코 시계. 마치 이 시계처럼 어머니는 늘 사람은 둥글고, 모난 데 없이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 안 따르고, 잘난 척 모나게 살아온 나의 삶은 기스 투성이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

# 효도와 불효의 차이
당신은 본인이 효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가? 그렇다면 불효일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내 자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100% 효자였다고 굳건히 믿고 살아왔다. 그리고 늘 효자라는 말을 부모님에게서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듣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근래에야 깨달았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효자일 수도 있었고, 나 또한 내가 효자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 행동들은 힘들었던 삶을 받쳐 주기 위한 행위였거나 부모님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억지 춘향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인생에서 우리가 시간으로 얻는 참교육과 진리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또한 얼마만큼이나 큰 것인가? 왜 나이가 들어서야만 철이 들고,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할까?
모든 남성은 자신의 여인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여자인 것조차 망각하고 산다. 나는 어머니의 세이코(Seiko) 시계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성격과 어울리게, 작지만 둥근 시계 얼굴은 모진 것을 기피하셨던 어머님의 마음과 같고, 가늘지만 튼튼한 시계 줄은 강인한 한인 모성애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아무리 교양미 있고 만사에 순한 어머니도 일순간 자식 사랑에 독한 여인으로 돌변 가능한 것을 나는 목격했다.

# 김치 GI
미군 병사(당시 한국에서 ‘김치 GI’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런 표현을 나는 무척 싫어했다. 미국사람에게 ‘치즈 GI’라 하지 않으면서 굳이 한인 미군들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로 한국에서 1년여 복무하던 총각 시절, 나는 두 명의 처녀를 연애로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용산 어머니 집에 같이 가서 인사를 시켰다. 두 여인 모두 당시 내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진취적이고 괜찮은 상대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두 명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리, 우리 ‘쿨’한 어머니에게 완전 퇴짜를 맞고 말았다.

# 성병과 고아원
그 이야기에 앞서, 일단 간단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김포공항은 거름 냄새 나는 논밭이 주위에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이때, 내 스스로 “참 인간 마음 간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미군으로 처음 도착하면 일단 용산 8군 본부로 이송되어 첫 하루를 보냈다. 첫날 큰 강당에서 새로 도착한 병사들에게 한국에 대한 간단한 군사, 정치, 문화 설명과 함께 앞으로 배속될 부대가 정해진다. 또 군의관이 나와서는 참으로 형용하기 민망한 의료사진들을 큰 스크린에 보여주며, 성병에 주의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맨 끝 편에 미군 군목 장교의 가슴 저린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는데….

# 간절했던 고아들의 눈빛
그 나이 지긋한 백인 군목은 스크린에 비쳐진 어린 고아원 아이들을 가르치며, 너희들 중에 분명히 누구인가는 이 머나먼 이국땅에 너의 씨를 뿌리고 달아나겠지만, 저 많은 고아들은 평생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천대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아이들의 절박해 보이는 눈빛 표정들과 군목의 부드러우나 근엄한 설교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나는 군목에게 그 고아원 주소를 물어 보았고, 얼마 후 어머니에게 그 아이들 중 한 여아를 내가 입양하면 어떻겠냐고 물어 보았다. ‘쿨’한 줄만 알던 어머니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때의 경험이 후에 절대 아빠 없는 사생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내게 각인되고, 또한 내 인생에 크나큰 이정표를 남기는 사건의 모태가 된다.

나의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이런 부분이 어머니에게는 분명 불안의 소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군인이었으나 미성년자인 내가 한국에 오자마자 연애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불안해 보였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도 어머니는 연애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았다. 진보 성향이었던 어머니, 연애결혼 하신 어머니는 오히려 어느 여자든 마음에 들면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그대로 믿었던 내가 또한 너무나 순진했었다.

# 앤디 깁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
첫 여인은 용산 부대 내에서 만났다. 얼굴은 백자처럼 고운, 그리고 모든 언행이 거침없으며,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늘 웃었다. 그녀는 부대 내 교환수였고 우리는 만나자마자 8군 볼링장도 가고, 군내 극장에서 ‘Saturday Night’ Fever‘도 관람하고, 그녀는 앤디 깁(Andy Gibb) 노래 를 콧노래로 부르곤 했다. 당시 한여름 열풍처럼 불던 디스코 음악에 빠져 춤도 추었다.

그리고 한 달의 짧은 연애기간 만에 “우리 어머니 만나 볼래?” 하고 물었더니, 아무 주저 없이 집까지 따라왔다. 물방울무늬의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었던 그녀와 용산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처음으로 그녀의 발걸음에 주저함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앉아 계셨고, 그녀는 90도 인사를 하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날쌔게, 마루 위로 올라가서는 “어머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저 ***에요” 하면서 살갑게 굴었다. 그 모습이 내 눈에 너무나 예뻐 보였다. 어느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놓지 않고자 하는 그녀의 능동적 의지도 보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생활에 딱 맞는 맞춤형 며느리 감이었다.


# “너 책임질 일 안했지?”
그러나 자식에게만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어머님의 시각에서는 굴절된 모습들이라고 추측된다. 불과 십여 분의 만남에서 어머니는 그녀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기억으로는 그리 많은 질문이나 답변이 오고 가지도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그녀와 밖으로 나 왔다. 그리고 밤늦게 다시 돌아온 집에서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너, 그 애가 좋니?” “왜? 엄만 싫어?”
“너… 책임질 일 안했지?”
“아이참,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해, 엄마 아들 착해.”
정말 그랬었다. 그때까지, 아니 한참 후 까지 나는 숫총각이었다.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고, 키스는 남자 마음에 불 때우는 것이었고, 같이 잔다는 것은 평생을 같이 산다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한참을 뜸들이더니, 결론지어 말씀하셨다.
“그러면 됐다. 다시는 그 처녀 만나지 말아라.”

나는 강력 반항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셀폰도 없던 시절, 유일한 연락처는 어머님 집 전화번호였다. 분명, 그녀가 몇 번이나 집으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졌다.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 사유는 다음 여인 이야기에서 논하겠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니 말씀에 순종했었다. 그것이 효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확고한 의지와 믿음 속에서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효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셨다.

두 번째 여인 역시 어머니에게 확실하게 거절당했다. 첫 여인은 나에게 아무런 심리적 고통을 안기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 최소한 내가 간직한 그녀의 모습은 발랄한, 그래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면 두 번째 여인은 평생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녀가 나에게 준 상처가 아닌, 내가 (어머니) 그녀에게 주었을 상처 때문이다. 상처란 무엇인가? 지금 그 뼈저렸던 통증은 가셨지만 아직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그리고 그런 고통이 때때로 느껴지는 그런 것이 상처다. 그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룬다.<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Jeff Ahn>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