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창세기를 묵상하고 있다. 어제 오늘 읽고 묵상한 내용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열 두 아들들과 그의 후손들을 내다보며 축복하는 기록이다. 말이 축복이지 두 아들 유다와 요셉을 빼놓고는 모두가 책망과 저주에 가까운 예언들로 가득차 있다.
자식을 축복하고 싶지 않는 아비들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찌하여 아비 야곱은 축복보다는 책망과 통탄을 선포했을까? 아무리 아비가 아들들을 축복해도 아비 위에 계시는 심판자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아비라는 존재는 아들들이 어려서 무의식 속에서 행했던 손짓 발짓 하나까지도 선인지 악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기억하는 본능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런 기초 데이타 베이스 위에 아들들이 성장하면서 살아온 기록들이 첨가되어 미래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따라서 아비는 엄연한 각자의 데이타 베이스에 벗어나서 축복을 저주로, 책망을 축복으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 야곱은 축북의 기준을 이렇게 토로했다. “각 아들들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49:28) 이것이 축복의 기준이었다.
이 기준이 정확하다면 나의 운명은 누가 만드는가? 환경이 아니다. 타인의 영향력으로 나의 운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미래 운명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번 선포된 미래의 운명은 과연 변경할 수 있는가? 없다고 믿고 사는 자들에게는 운명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상이 물려준 불행한 운명이라도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인생을 역전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베냐민과 그의 후손들의 케이스를 검토해 보면 이 주장은 자명해진다. 아비 야곱은 막내 베냐만에게 ‘너는 물어 뜯는 이리요,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라’(49:27) 미래의 운명을 선언했다. 베냐민들의 후예들은 평생 호전적이고 잔인한 미래를 살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힘이 없어 모압 족속들에게 18년이나 정복 당하고 시달릴 때가 있었다. 모두가 국가의 운명으로 받고 비참하게 살아갈 때에 왼손잡이 에훗이라는 무명의 사사가 일어나 모압왕을 정복했다. 그리고 동족들에게 80년의 평화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 에훗이 베냐민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다. 기독교의 창시라고 불리울 만큼 예수의 복음을 정립했던 바울도 역시 베냐민의 후손이었다. 운명론으로 말하자면 바울도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잔인함과 강인함이 결국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을 서게 했던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을 일망타진하기까지는 자신의 생명도 내놓고 앞장섰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바울이 되었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론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삶의 분량을 최대한 넓히는대로 인생의 운명은 결정된다. 하루 속히 운명론을 벗어 버리고 받은 삶의 달란트를 갑절로 늘려 잘했다 충성스런 인생으로 인정받기를 기도한다. 나의 운명은 결국 나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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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열/뉴욕센트럴교회 담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