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로 우리 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연방 대법관에 대한 애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영웅적 용기로 여성의 법적 평등, 나아가 인간의 평등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챔피언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이다. 특히 이 땅의 여성들은 그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인하면서도 여성적이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온 그는 뜻한 바를 관철시킬 때까지 굽힐 줄 모르는 열정의 여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긴스버그 대법관보다 19년 전, 여성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미국보다 훨씬 더 척박했던 한국 땅에 이태영 박사가 태어났다. 여성 평등이라는 단어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 온 생애를 바쳐 여성인권운동을 이끌고 관철시킨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다.
네 명의 자녀를 두고 뒤늦게 서울 법대에 입학한 그는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자신의 피나는 노력은 물론, 그 뒤에는 못지않은 남편의 외조도 있었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는 미국유학 후 모교에 남으라는 교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항일운동, 민주화운동을 하던 한 청년과 결혼의 길을 택했다. 계속되는 남편의 감옥살이로 생계를 떠맡게 되자 광주리 행상과 삯바느질을 하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녀들을 키웠다.
드디어 남편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제는 내가 당신을 내조할 차례요”라며 그의 법과대학 입학을 적극 도왔다고 한다. 남편 정일형 박사는 미국 뉴욕대와 드루대학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 연희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평생 야당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8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2공화국의 외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다.
이태영 박사는 졸업 후 판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여자라는 이유로, 또 야당 국회의원 마누라라는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 개업을 시작하자 사무실은 물론 퇴근 후에도 억울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택에까지 몰려들어 아이들이 마땅히 지낼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연을 들으며 비참한 대우를 받는 어머니, 아내, 딸들의 법적, 사회적 위치를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무료 변호를 시작했다.
한국의 남존여비사상의 통념을 깨려면 우선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개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개정안을 들고갔는데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살고 있는데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휘젓고 다니느냐”며 호통을 쳤다. 생각 끝에 가족법 개정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할 ‘여성법률상담소’를 1956년에 설립하고 강연회, 공청회, 홍보물 제작, 국회의원들에게 전화나 편지로 호소, 가두 캠페인 등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뿌리 깊은 유림들의 ‘노처녀 과부집단’ ‘가족을 파괴하는 패륜녀’ ‘한국을 떠나라’는 욕설과 협박이 잇달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고 53년 첫 개정안을 낸 후 5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가족법 개정을 통과시켰다.
호주 상속과 재산 상속의 분리, 부부 공동재산 인정, 이혼 시 재산분할 청구권 내지는 친권과 양육권에 대한 권리 등이다. 남편이 바람피우고 이혼을 요구해도 아내는 위자료도, 자식 양육권도 없이 쫓겨나야하는 당시 상황에서 참으로 과감하고 혁신적인 일이었다.
84세로 타계한 이태영 박사는 생전에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많은 상을 받았다. 막사이사이 상, 국제법률 봉사상, 세계평화상, 그리고 그 유명한 브레넌 인권상 등이 있다.
한국내의 여성 문제가 개선되어가자 해외 한인동포들이 낯선 땅에서 겪는 문제를 돕고자 세계 곳곳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웠다. 1983년 설립되어 현재도 LA 한인커뮤니티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한미가족봉사센터’가 그 중 하나다.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여성을 위해 생애를 바친 긴스버그와 이태영, 두 분께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를 바친다.
<
장경자 가정법률사무소 전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