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만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 온 나에게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보다 중학교 때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더 가깝다. 특히 다니던 중학교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겨우 2회 졸업생이 되었던 나와 친구들은 함께 공유한 신생 학교에서의 특이한 경험 덕택에 서로 더욱 친근감을 느낀다.
무작위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은 후 처음 들어보았던 이름의 학교 위치가 과연 어디인지부터 수소문해 보아야했던 내 모교는 서울 영등포구 시흥동 산중턱에 자리했다. 그 당시 많지 않은 남녀공학이기도 했던 그 학교의 입학식 때 보았던 학교 건물 모습은 초라했다. 사실 그 다음 해에 들어올 학생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실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가 1학년을 다니던 동안 내내 증축 공사가 진행되었다. 나무도 별로 없던 돌산을 깎아내어 만들었던지라 중학교 3년 내내 월요일과 토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열렸던 조회가 끝난 후 전교생들이 운동장에 널린 돌들을 주워 버려야 했다.
비가 오면 산에 있는 흙이 씻겨 내려오곤 했기 때문에 이를 줄이기 위한 식목작업을 식목일뿐 아니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있었던 실업 시간에 종종 하기도 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왜 학생들이 학비를 내면서 무상노동까지 제공해야 하는지 어린 중학생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반 배정은 성적에 따른 석차 순이기도 했고, 3학년 때는 전교 1등부터 30등이 맨 아래 1등부터 30등과 한 반에 배정되었다. 그런데 국영수과 등의 주요 과목은 다시 성적 석차 순으로 1등부터 60등이 헤쳐 모여 함께 공부했다. 미술, 음악, 체육 등 비주요 과목은 원래 배정된 대로 반별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3년을 같이 생활했기에 나에게는 중학교 친구들이 더 가깝다. 그래서 내가 고국을 방문할 때는 중학교 친구들을 맨 먼저 만난다.
2년 전에는 이렇게 만나는 친구들 몇 명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기로 했다. 우선 미국을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러 나오는 친구들의 명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오래 전에 미국에 있는 나에게 보내주었던 편지들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나를 만나러 나오는 친구들 거의 모두의 편지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을 하나씩만 복사해 따로 따로 봉투에 담았다.
그렇게 준비했던 편지들을 친구들에게 건넸다.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인 70년대에 쓴 편지를 내가 40년 이상 보관하고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친구들은 자신들의 옛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본인이 그 시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래된 편지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왜 보관했는지는 모르겠다. 7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와 10년 정도 기간의 편지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후의 편지는 많지 않다. 나도 아마 8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손 편지들을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후에는 나도 손 편지를 별로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즈음도 어쩌다 몇 장씩 꺼내 보는 손 편지들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그 편지들은 내가 쓴 편지들의 답장이 될 수도 있고, 또한 그 편지들에 대해 내가 답장을 썼을 것이라고 전제하면, 편지 내용들은 결국 나의 당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지들 가운데에는 여자들로부터 온 것들도 있고 종교적인 내용도 있다. 친구들의 고민을 담은 것들도 있다. 내가 부끄러워야할 내용들도 있고 감동을 주는 내용들도 있다. 요즈음 집에 있는 물건들을 조금씩 줄여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편지들은 감히 손 댈 수 없을 것 같다. 너무 소중한 나의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캔을 해서 컴퓨터에 저장해두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직접 손으로 봉투에서 꺼내 손가락으로 넘겨가면서 읽는 그 맛은 아마도 재생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이메일이나 텍스트만 아니라 가끔은 손 편지를 직접 써보기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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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