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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닌데…

2020-09-01 (화)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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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두려움, 죄의식, 수치심은 삶의 길목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감정들이다. 원시시대 이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가끔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들을 만날 땐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최근 운전면허 갱신을 또 했다. 세어 보니 미국에서 16번 정도 한 것 같다. 그때 마다 창피하고 당황스럽고 나 자신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소인처럼 여겨진다. 가슴에서는 이게 아닌데 하지만 손은 장기기증 여부를 묻는 난에 ‘아니오’를 체크하기 때문이다. 담당직원의 싸늘한 시선을 뒤통수로 의식한 채 도망치 듯 빠져나오는 모습이 처량하다.

사회적, 윤리적 책무를 알고 있고, 좀 배웠다는 사람으로서 매번 ‘아니오’를 택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야기는 19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대 첫 해는 주로 해부학 공부에 중점을 두었다. 연건동 서울의대 캠퍼스 한 구석 시체 해부학 실험실에서 봄부터 한 학기 이상 시체해부에 매달려야 했다. 실험 맨 첫 날 시체실에 들어갔을 때의 광경과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게 뇌와 가슴에 남아 있다. 온통 포르마린 냄새로 젖어 있는 실험실 내의 하얀 철판 위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 많은 시체들이 밝은 형광등 아래 더 푸르스름하게 놓여 있었다. “이 분들은 너희들의 공부를 위해 여기에 누워 있는 기증자들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교수님의 말씀도 있었다.

기증자에 대한 묵념을 한 후 곧바로 2사람이 한 조가 되어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목 바로 밑에서 가슴 정강이까지 첫 커트(Cut)를 마쳤다. 해부가 진행됨에 따라 처음의 엄숙했던 감정이 점점 무디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며 놀랐다. 그 뒤 4-5개월 동안 가슴뼈는 작두로, 두개골은 톱으로, 다른 장기들은 예리한 칼이나 묵직한 칼로 찌르고 자르며 죽은 자의 몸 각각의 부위를 세밀히 관찰하며 시체해부를 끝냈다.

보통 의사들이 장기기증을 가장 적게 한다는 말이 있다. 아마 의대시절의 시체해부 경험이 편도체-해마-측두엽-전두엽으로 이어지는 감정과 기억의 뇌 회로에 깊이 각인된 후 편견이란 정서가 되어 밖으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정보와 경험으로 인해 어느 집단, 상황,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견해를 나타내는 행위다. 보통 성장하며 배운 사회적 학습과정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편견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되지만 가끔은 위험에서 벗어날 도구가 될 때도 있다. 가령 우범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부정적인 정서와 평가는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형태만 조금 바꿀 뿐이다.

편견이 심한 사람은 내면에 수치심도 많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정신 사회적 인격발전 단계를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주로 3세 전후 걸음마기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아장 아장 걷고,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시야영역과 운동영역이 확대되고, 특히 배변훈련 후 점점 자신만만해진다. 종종 이제 어머니가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즉 자율성이 형성되는 때다.

그런데 가끔 배변에 실수하면 매우 수치심을 느낀다. 이 단계에서 자율성과 수치심 사이의 갈등을 잘 헤쳐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후에 사회성이 결핍되거나 강박성이 심한 성인이 된다.

누구나 주위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수치심, 사회적 양심이 부족한 편견 등 자신의 약점과 잘못을 외부에 노출하기를 꺼린다. 될 수 있으면 나타니엘 호손의 ‘주홍 글씨’ 속 주인공처럼 가슴 속에 새겨두며 살고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내적 외적요인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신은 인간을 동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다. 동물은 못 박은 본능을 바탕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했지만, 인간의 행동은 프로그램하지 않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결과 히틀러 같은 살인자도 나올 수 있고, 성 테레사 수녀님도 될 수 있다.

부정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다음 면허갱신 때는 장기기증 난에 ‘예’를 선택해 수치심을 없애볼까 생각해본다.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간이기에 편견을 바꾸도록 노력하면 될 것도 같다.

‘아니오’로 이기적 인간으로 낙인찍힌 후 계속 이를 반복한 부정적 스티그마 효과를 벗어날 수 있을까? 간절히 바라고 기대한 결과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 효과가 일어났다는 그리스 조각가 피그말리온 같이 되어볼까? 거기에 더해 교회에 가서 편견이란 괴물이 몸 밖에서 나가도록 신께 기도드리면 시너지 효과를 얻어 ‘예’로 바꿀 수 있을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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