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레이건이 카터를 선거인단 수로는 489대 49, 주로는 44대 6으로 이기자 민주당은 큰 충격에 빠졌다. 경제가 나쁘고 이란 인질 사태 등 악재가 있기는 했지만 현직 대통령이 이처럼 큰 차이로 진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1984년 선거에서 레이건이 먼데일을 선거인단 수로는 525대 13, 주로는 49대 1로 이기자 민주당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이런 절망은 반성으로 이어졌다. 리버럴의 기치를 내건 먼데일이 보수파의 기수 레이건에게 이렇게 참패한 것은 미국 유권자들이 전통적 리버럴과 이를 기반으로 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85년 민주당 지도자 협회(DLC)라는 것이다. 앨 프롬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는 리버럴의 가치를 중시하되 경제 정책에서는 균형 예산 등 보수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앨 고어와 현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 등이 이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DLC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당시에는 무명에 가깝던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 민주당원’(New Democrat)이라고 부르며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제3의 길’을 주장했다. DLC의 입김은 1988년 ‘원조 리버럴’을 자칭하며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두카키스가 참패하면서 더욱 거세졌고 1992년 DLC 의장이었던 클린턴은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대다수 미국인은 그 때까지도 ‘신 민주당원’과 DLC가 뭔지 잘 몰랐다. 그러나 92년 4월 LA에서 폭동이 터지면서 클린턴이 온건한 개혁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시스터 술자라는 흑인 민권 운동가가 “흑인들이 매일 흑인들을 죽인다면 한 주간은 백인들을 죽여보는 것은 어떤가”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술자는 드와이트 모로고를 다니며 재능을 인정받아 장학금으로 코넬대 하계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러트거스대학에서 미국 역사와 흑인학을 전공하며 인종 차별이 구조화돼 있는 남아공 투자 철회를 성공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흑인들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주당 인사들이 떠오르는 민권 운동가인 술자의 과격 발언에 침묵하고 있는 동안 클린턴은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제시 잭슨 목사에게 술자를 그가 주도하고 있는 ‘무지개 연합’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했다. 클린턴의 이런 소신 있는 발언은 그가 전통적 민주당원과 다르다는 것을 많은 사람 뇌리에 새겼고 그가 대선에서 이기는 요인의 하나가 됐다.
2020년 대선은 현재로서는 바이든의 승리가 유력해 보인다. 대다수 여론 조사에서 10% 포인트 차로 트럼프에 앞서고 있는데 대선을 두달 남짓 남겨놓고 현직이 이런 격차를 뒤집은 예는 별로 없다.
그러나 아직 결과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서 미국내 감염자 수가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미국 경제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골수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반면 바이든은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보다 트럼프가 싫허서 그를 찍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
지난 주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트럼프와 공화당이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줬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낙태와 총기 규제 반대, 불법 체류자 단속과 국경 장벽 건설, 미국인들의 일자리 보호를 위한 보호 무역 전쟁 불사 등 핵심 지지 계층이 좋아할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는 연설 중 트럼프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바이든을 민주당 극렬주의자와 묶으려 한 것이다. 그는 최근 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로 인종 차별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일부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며 방화한 것을 이를 용인한 민주당과 바이든 탓으로 돌리고 바이든이 집권하면 미국 전역이 폭동과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폭동은 평화적 시위 규모에 비하면 극히 일부지만 민주당 지도부가 이를 무시하거나 용인하는 입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시위와 폭동이 확대되고 민주당이 이를 감싸고 도는 인상을 줄 경우 대선 결과를 좌우할 경합주 중도층이 민주당에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바이든과 민주당은 92년 클린턴의 ‘술자의 순간’을 기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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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