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새벽 3시반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있다니… 얼마전 업종을 추가해 인슈어런스 에이전시 오너 타이틀을 새로 달면서 7과목을 셀프 스터디로 마쳐야 하는데, 1과목만 마치고는 다한 걸로 착각했다가 뒤늦게 밀린 숙제를 부랴부랴 하고 있는 중이다. 오가는 이메일을 허투루 귓등으로 읽은 것이 잘못이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 보니, 빛나는 성과와 언제나 연결된 것만은 아니지만, 누구나 처럼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78년 1월부터 떠꺼머리 총각으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서 주경야독하던 시절이다. 국제금융부 회계팀에서 1년간 일하다, 생애 처음으로 창구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외환은행과 조흥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국제부 직원들을 고객으로 매일 맞이하는 일을 했었다. 해당 은행들은 당시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스웨터, 가발, 에나멜 웨어(법랑식기), 기계류 등을 엄청 수출하던 삼성, 대우, 현대 등 종합상사를 비롯한 중견 무역업체들을 상대로 수출금융인 ‘네고(Negotiation)’를 해주고 그에 대한 채권인 수출환 어음(Bill of Exchange)을 중앙은행으로 가져와 담보로 제출하고 재할인을 받아갔다.
내 업무는 그 은행들이 수출기업에 대한 네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외화 유동성을 재할인 형식으로 채워 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바쁜 하루의 일과를 마칠 오후 4시반 무렵이면 전산부에서 일하던 고교동창 규환이를 구내식당에서 만나 자장면을 같이 먹고 함께 등교할 준비를 했다.
은행 근처인 태평로에서 우이동 가는 8번 시내버스 동북운수를 타고는 비원과 창경원의 돌담길을 지나 명륜동 캠퍼스로 매일 등교를 하느라 나는 그 아름다운 금잔디 광장에 한번 앉아본 적이 없었다. S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한 사람들이 많이 간대서 S’ 대학으로 알려졌던 그곳에서 저녁 6시 첫 교시가 시작이 될 때만 해도 또렷했던 의식은 2교시가 되면 학교 오기전에 먹었던 자장면이 뱃속에서 불어 오르며 사정없이 하품이 쏟아졌고, 나는 청상처럼 허벅지를 꼬집거나 볼펜으로 찌르며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곤 했었다. 수업을 마친 9시부터 자정까지는 바로 위층의 법정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다음날은 독일어나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서 7시 새벽반 강좌를 듣고 출근했으니, 그 시절 나의 하루는 얼마나 팍팍했겠는가…. 한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주말을 틈타 초딩 단짝 친구중 한명이었던 여수에서 전학 온 기철이네 집에 놀러가면, 어머니가 외아들 친구라며 그렇게 맛있게 여수식 장어국을 끓여 주셨었다. 순식간에 한그릇을 뚝딱 해치운 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한시간 가량 달콤한 낮잠을 푹 자고 깨면, 친구는 넌 자러 왔냐, 놀러 왔냐 하며 볼멘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내 몸이 나에게 피곤하다는 아우성을 치던 시절이었다.
고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4년째 와병중이던 아버지는 생명의 촛불이 꺼져가는 걸 느끼셨는지 매일 자정이 다 돼서야 파김치가 돼 귀가했다 새벽같이 나가는 아들과 살가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셨다. 좀 빨리 돌아오면 안되느냐는 말씀을 힘없이 하셨던 것이다. 가뜩이나 없는 시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맥 놓고 한가하게 일찍 귀가할 수는 없다며 58세를 일기로 곧 돌아가실 아버지의 소원을 못들어 드려 불효를 저질렀던 것은 내 일생일대의 후회막급한 일이었다. 지금 세상에는 아주 간단한 수술로 완치된다는 심장판막증으로 54세에 몸져 누우시기까지 아버지는 오퍼상을 하셨었다.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를 밥상에 올려놓으시고 먹지를 넣고 겹친 편지지에 타닥타닥 타이프를 쳐서 알미늄 냄비, 유리 식기, 스웨터, 한천(agar agar) 등의 수출가격을 기재한 오퍼 레터를 외국 바이어에게 보내셨다.
사우디, 미국 등지의 바이어로 부터 L/C(수출신용장)를 받으시면, 해당업체와 조율해 납기에 맞춰 무사히 선적한 다음 은행에 가서 네고를 하시는 거였다. 그런 날은 마치 잔칫날 같아서 우리는 모처럼 맛난 저녁도 먹고, 나는 밀린 수업료도 받아낼 수 있었다. 대학 2학년이던 19살 봄, 아버지는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고, 부서 이동으로 문서부로 발령이 난 나는 행내 사보인 ‘한은 소식’의 취재, 교열 및 편집기자로 2년간 일하였다. 한달에 한번씩은 조선 8도에 산재한 지방 지점과 출장소 등을 탐방하는 기사도 썼다.
그러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은행을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으로 4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었고, 우이동과 경기도 광주읍 하산곡리 등에 있는 고시촌에 들어가 하루 15시간 공부하는 강행군을 했는데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제일 많은 공부를 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보고 더 이상 군복무를 미룰 수 없어 공군장교로 입대를 한 것이 1983년 2월. 제대 이후 2002년 1월, 이민 오기전까지 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서울역 앞 대우센터안에 위치한 대우그룹 전담 점포의 지점장을 하다 교포은행의 오퍼를 받고 실리콘밸리로 왔다는 이력은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 3년정도 일하다 내 사업을 하겠다며 그만두고 스탠퍼드 라이브러리로 매일 도시락을 2개씩 싸서 역시 자정까지 3개월간 공부해 부동산 브로커 시험 첫 응시에 시원하게 합격했던 것이 14년전의 나의 마지막 열공의 기억이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라지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