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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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의 꿈

2020-08-22 (토)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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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위로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제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해 아쉬웠던 듯 하늘에서는 다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제보다 서둘러 찾아온 어둠이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불안한 몸짓으로 껌벅이던 가로등은 겨우 안정을 찾은 듯 평온한 모습으로 불을 밝힌 채 점차 굵어지는 빗속에 서 있었다. 아내는 밖의 소란스러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붉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밥상을 차렸다. 아내가 볼륨을 높여 놓은 빗방울 전주곡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겹치고 때로 비켜가며 하모니를 이루는 지극히 평화스러운 밤이다.

아내가 차려놓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아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앉은뱅이 선풍기 한대가 전부였던 아주 무더운 여름, 저녁을 먹기 위해 작은 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때묻은 일곱의 얼굴들이 있었다. 키가 작은 외할머니는 장터에 오다 들렸다며 냉수 한 모금 마시기 바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그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던 엄마의 손에는 외갓집 담장 뒤에서 자란 옥수수가 들려 있었다. 지금도 선명한 할머니의 구부정한 허리와 그런 할머니의 뒷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어린 엄마, 밥을 반쯤 남겨놓고 엉거주춤 일어서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늘 그 자리에 걸려있는 빛바랜 사진이 되어 기억 저편에서 말을 건다.

코비드(Covid)의 확산 속도는 이미 통제를 벗어난 듯 보이고 상황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무덤덤해져간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경계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오랫동안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눈다. 굳게 닫혔던 작은 가게들이 ‘We’re open‘ 이라는 사인을 하나둘씩 내걸고 힘겹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그 옆의 커다란 상가의 입구에는 ’Rent Here‘ 라는 사인을 유리창마다 걸어놓으며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른다. 어쩌면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는 처음부터 두개의 사인만이 존재하는 구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둘 다 살고 싶다는 간절한 몸짓이어서 그것을 보는 이에게는 목이 메이도록 서글픈 풍경이다. 큰 건물을 가진 부자도, 작은 가게를 열어 하루를 연명하던 이들도 이 뜨거운 여름의 한 가운데를 함께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남부를 강타한 열대성 태풍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긴박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빨라졌으나 실시간으로 다가오는 태풍의 위력은 우리집 앞마당에 서있던 나무가 부러져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서야 실감했다. 긴급 재난 정보가 두어차례 있었고, 바쁘게 오가는 구호 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불안감을 더했다. 비가 쏟아졌고 거친 바람이 도심을 흔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시는 부러진 나무들이 뒤엉켜 속속 폐쇄 되었다.

비와 바람은 오래지 않아 멈추었으나 전깃줄에 기댄 채 위태롭게 버티는 나무와 쓰러진 전신주들은 온 동네를 암흑으로 몰아넣었다. 주의 대부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어 정전된 지역이 광범위하다는 뉴스를 보며 정상적인 전기 공급이 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으니 기다림의 시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여름 밤의 어둠은 짧았고, 폭풍이 지나가며 한 풀 꺾인 더위는 덧창을 열면 견딜 만했다. 또한 정전으로 도심의 상가들이 모두 폐쇄되었고 골목마다 부러진 나무를 치울 때까지 문 밖을 나설 수 없었음에도 그동안 코비드(Covid)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던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정전이 되며 인터넷이 끊어진 채 이어지는 일상은 무척 길고 답답했다. 인터넷을 통해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또 휴식을 취했던 사람들이 그 시간들을 일시에 박탈당한 것이다. 더불어 바깥 세상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자 세상과 단절된 느낌마저 들어 불안감을 더했다. 은퇴 후에는 도시를 떠나 아날로그의 삶을 살겠다던 나의 꿈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었다. 나는 이미 디지털 세상에 심각히 오염되어 있으며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참으로 불온한 여름이다.

한껏 긴장한 채 무료한 여름을 보내고 있던 주말 오후에 가까운 지인으로 부터 갑작스런 초대를 받았다. 예정되어 있던 화려한 결혼식을 코비드로 이미 한 차례 미루었으나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이라 집에서 조촐한 예식을 한다고 했다. 신부가 자란 집 뒷뜰에서 가족과 가까운 친구만 초대한 결혼식은 소박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가난했으나 꿈이 있는 사내와 유명 여배우 같이 아름답지 않지만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현명한 여자는 부부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이끈 이들 앞에서 경건하게 서약했다. 신부의 손에서 연 보라빛 수국 꽃다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했고, 범접하기 어려운 존귀함이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그 젊은 부부가 수국꽃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날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 ’여름 그 어느 날‘의 기억으로 간직하기로 한다.

언제나 계절은 바쁘게 바뀌었고, 꽃은 쉼 없이 피었다 졌다. 수많은 사람이 무참히 죽어갔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났을 것이다. 오늘도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다시 다른 계절로 건너가려 한다. 성급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창을 넘어 왔으나 아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조용히 저녁 식탁을 정리하고 있다. 어둠 속으로 여름이 천천히 그림자를 끌고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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