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부터 때 아닌 장대비가 쏟아진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식물의 갈증을 풀어주는 빗줄기가 온 세상에 퍼져있는 코로나바이러스도 말끔히 씻어준다면..., 실없는 상상을 해본다. 요즈음 흔하게 듣는 말이 ‘비대면’, ‘언택트’, ‘뉴노멀’이라는 단어이다. 얼굴을 직접 대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피해 전화나 온라인으로 생업과 일상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말이다.
길을 걷다가도 사람들과 마주치면 서로가 멀찌감치 피해서 걷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다른 데를 보고 걷다가도 누군가가 보이면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며 “HI!”하던 모습이 이제는 지나가버린 옛 영화 속 장면 같고,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어 서로의 표정을 읽는 것마저도 쉽지 않다. 나는 한 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제스처로 마스크 속에서 웃고 있다는 나름의 신호를 보낸다.
매일같이 뒷마당에 날아와서 지렁이를 쪼아먹고 놀다 가는 로빈네 부부와 호시탐탐 울타리를 기웃거리며 텃밭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들토끼 식구들은 아무 걱정 없이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를 잘 견디고 있다. 식물들도 천하태평으로 봄꽃을 피우더니 세상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며 싱그러운 여름 기운을 내뿜는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노심초사하며 행동에 제약을 받고 희생자를 속출하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이동에 제한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자유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포기하기 어려운 기본적인 권한이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오랫동안 속박을 받고 있으니 불편한 것이다.
띵동! 소리에 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택배 물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안전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현실에, 가슴속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심리적 불안감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꼭 필요한 일을 보러 밖에 나가거나 장을 볼 때도 후다닥 해치우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돌아오게 된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런 생활이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갑갑하고 스트레스가 되었는데, 익숙해지니 편안하고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시간이 절약되어 생활의 여유로움마저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마음을 풀어내는 시간을 갖는다며 애써 태연하게 웃기도 한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을 때처럼 웃음 끝이 쓸쓸했다.
어떤 식으로든 문명은 진화한다. 노멀이 되어버린 뉴노멀 개념이 아직은 낯설다 해도 수긍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꽤 많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던 사람도 핸드폰이 없으면 자기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기 어려워졌듯이, 지도를 펴놓고 운전하던 습성이 언제부터인가 내비게이션에 의존하게 되면서 그것이 노멀이 되었듯이.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이전의 생활로 복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이 나온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빛으로 교감하며 대화하는 게 노멀이던 시대는 사라지고, 비대면 언택트 문화를 뉴노멀로 인정해야하는 시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리라.
친구를 만난 지 오래되었고 학교 수업이나 직장 업무뿐 아니라, 쇼핑이나 웬만한 사무적인 일들도 집에서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데 익숙해진다. 젊은 층에는 그런 일들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겠지만, 오프라인에 익숙한 노년층의 삶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순환하지 못하는 시간은 마냥 더디게 지나가며, 마치 정체된 삶의 단면을 체험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집 밖의 세상에 나가서 때로는 맞서고 부딪히고 손 내밀고 잡아주고 하던 시간들이 힘은 들었어도 은연중에 삶의 에너지가 되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재와 가상의 공간이 교묘하게 혼재된 세상에서 둘 사이의 비율을 알맞게 조절해야 바람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백신 개발을 기다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활 양상이 달라져, 직접 만나지 않고 화상 모임을 갖거나 물품을 구매하고 각종 서비스를 받는 등 언택트 문화 자체가 비중 있게 자리를 잡아간다. 변화에 적응하는 생물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자연의 질서를 생각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다만 우리의 삶이 디지털 공간이라는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우리는 이렇게 잃어버린 정서와 감정을 어디에서 회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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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